스스로 천하를 호령하는 대제국 건설 꿈 이루다

  
 
  
 
(전편줄거리) 서기 624년 수나라의 목재상 무사확의 둘째딸로 태어난 ‘무미’는 빼어난 미모와 함께 학문을 겸비했다. 13세에 당태종 이세민의 후궁전에 들어갔으나 억세고 냉혹한 성격은 당태종으로 하여금 그녀를 멀리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당태종의 아들은 남몰래 무미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당태종이 죽자 비구니가 되어 사찰에 들어가 있던 무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그녀를 짝사랑하던 고종(당태종의 아들)이 그녀를 데리고 환궁한 것이다.
무미는 궁에서 황후 왕씨와 짝을 이뤄 고종이 총애하던 후궁 소숙비를 제거하고, 이어 황후마저 내쫓음으로써 자기 자신이 황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야심은 여기서 그칠 것 같지가 않은데….

장남을 독살하다
고종의 장남 ‘무기’는 무미의 음모에 의해 먼 변방으로 쫓겨났다가 자살을 강요당해 저 세상 사람이 된지 오래…. 황태자는 무미의 자식 중 장남인 이홍(李弘)이 물려받았다(656년).

‘황후의 자리에 올랐고, 황제는 멍청해서 내 손아귀에 있는데다가 장남이 장차 대당제국의 황제에 오르게 되니 가히 천하는 내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런데 뭐지? 그래도 뭔가 허전한 이 기분은?’
무미…. 이 무한 권력욕의 여인은 마음 속 깊숙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자신의 나라, 자신이 황제가 돼서 천하를 호령하는 대제국의 건설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황태자 이홍은 아버지 고종의 품성을 이어받아 어질고 자상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 무미가 남들을 핍박할 때마다 그들을 몰래 돕고 위로했으며, 목숨을 구해준 이들도 많았다. 이홍은 어머니를 보면서 늘 한숨지었다.
‘어머니께서 욕심이 너무 과하시니 참으로 이 나라의 근심이로구나.’

고종 황제도 어진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이즈음 고종은 병세가 날로 악화돼갔다. 고종은 이홍에게 빨리 왕위를 물려주려했고, 덕망을 한 몸에 받던 이홍을 수많은 신하들이 받들었다. 그러나 무미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지금 황태자가 황제에 등극하고, 새로운 기운과 물결이 천하에 펄럭인다면 나의 야망을 실현하기는 좀 곤란해진다.’

무미의 결심이 선 이후, 황태자 이홍은 독살된 시체로 발견됐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이홍이 죽은 지 한 달 만에 둘째아들 ‘이현’이 황태자로 책봉됐다. 이현 또한 형 못지않은 어진 성품과 배포, 총명함을 지녔던 사람이다. 대신들은 다시 이현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저 아이도 위험해 안 되겠어. 따르는 자들이 너무 많아….’

끝없는 숙청
새 황태자 이현도 무미의 간계에 남아나지 못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새 황태자께서 색을 너무 밝힌다는 죄로 귀양을 갔다네….”
680년, 여색을 탐한다는 희한한(?) 죄로 파주로 귀양을 가게 된 황태자 이현은 그로부터 4년 후, 기어이 죽음을 당하고야 만다. 큰 아들에 이어 둘째 아들의 비참한 죽음까지 모두가 친어머니 무미가 저지른 일이었다.

황태자는 다시 셋째 ‘이철’이 물려받았다. 이런저런 궁중 비극에 진저리를 치던 고종은 몸이 쇄약해질대로 쇄약해져, 683년 마침내 세상을 마감한다.
이철은 고종이 붕어하자 곧바로 황제의 위에 오른다. 그가 당나라 ‘중종’이다.
중종은 형들에 비해 좀 모자랐다. 따라서 무미는 중종을 만만하게 보고 황제를 얼마든지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황위에 오른 중종은 그렇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그는 황후 위씨와 그 일족을 총애 해, 장인인 ‘위현정’을 재상에 앉히고 자신만의 정치를 구현해 나가고 있었다.
고종 시대부터의 재상인 ‘배염’은 무미를 찾아가 고한다.

“새 황제께서는 옛 사람들은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운 외척들만 사람 취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머니인 무측천님 조차 안중에도 없는 듯합니다.”
이 말을 듣고 격노한 무미는 즉시 대신들을 소집하고, 측근의 군사들을 전개처럼 움직여 황제를 폐위시키고 궁궐 깊숙한 곳에 감금시켜 버렸다.

“내가 황제니라”
황제의 자리는 다시 넷째 아들 ‘이단’에게로 돌아간다. 당나라 ‘예종’이다. 그러나 무미는 이때부터 사실상 모든 정사를 자신의 손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무미에게는 모든 제도와 문물, 사회구성, 통념, 명칭 등 기존의 것들이 맘에 들지 않았다.

‘뭔가 내 손으로 천하를 바꿔 볼 거야. 다른 이들에게 이런 것들을 맡기자니 너무 답답하고 성에 차지 않아….’ 그녀는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녀는 수도 낙양(洛陽)을 신도(神都)라 고치는 것을 시작으로 당 왕조에서 사용하던 문무백관(벼슬)의 명칭도 새롭게 바꾸었다.

‘장차 새 세상을 펼치려면 모든 것을 새롭게 바꿔놓아야 해. 눈치 빠른 벼슬아치 놈들과 일부 옛 세력들이 반발할테지만 일거에 제압하려면 철저히 준비를 해야 한다.’
680년대에 접어들며 각지에서 무측천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을 겪으면서 보이는 무측천의 태도는 그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684년 9월, ‘서경업’이라는 장수가 난을 일으켰다. 이때 유명한 시인인 ‘낙빈왕’이 무측천을 물리치자는 격문을 썼는데, 무미는 난의 진압 후, 이 격문을 보고 화를 내기는커녕 “이렇게 힘 있고 호소력 있으며 심금을 울리는 천둥 벼락 같은 글을 쓸 수 있는 이가 왜 내 곁에는 없는 것일까”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인재에 대한 끝없는 욕심은 그녀의 또 한 가지 장점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에게 충성을 바치는 인재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

스스로 ‘성신황제’에 올라
690년 9월 9일, 중양절을 맞이하여 마침내 무미는 새로운 세상을 선포한다.
“이제부터 황제 예종을 폐하고,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새 나라의 이름은 ‘주(周)’라하고 연호는 ‘천수(天授)’라 한다. 수도는 이미 이름을 신도로 바꾼 낙양으로 할 것이다. 앞으로 나를 ‘성신황제’라 칭할 것 이니라.”

이때 측천무후의 나이 67세였다.
그녀는 황제에 오르자 반대파들을 모조리 주살해, 중국 대륙에 엄청난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러나 그녀는 인재를 발탁함에 있어서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위주로 등용해 무측천 재위 중 궁중에는 중국 역사 어느 때보다도 인재가 넘쳐났다고 한다.

한편 자신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으되, 자신이 일생에서 거의 유일하게 애정을 주었던 딸 ‘태평공주’를 비롯해 최 측근 들까지 절대로 건방진 권력행사를 못하게 엄금했다.
705년, 그녀가 82세의 나이로 숨지기까지 측천무후는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으로 당나라의 산업, 경제, 문화, 국방, 인재등용, 외교 등 전 방위 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중국을 중세 세계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해 놓았다.

중세 최강국 반열에 올려
그녀의 잔혹한 정치적 야망, 피도 눈물도 없는 숙청, 애정이라고는 손톱만치도 없어 보이는 몰인정한 성정과는 별도로 직접 황제로서 통치한 16년 세월, 아니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정치적으로는 엄청난 치적을 이루어 냈다.
측천무후는 말년에 고심했다.

‘이 나라를 무씨의 나라로 남겨야 하나. 내가 죽으면 다시 이 씨의 나라로 넘겨줘야하나.’
그녀는 원래 황위를 자신의 조카 ‘무승사’에게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꿈에 앵무새의 양 날개가 부러져 있는 것을 보고 재상 ‘적인걸’에게 꿈풀이를 부탁한 후, 다시 황위를 유폐시켰던 아들 ‘이철(중종)’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앵‘무’새의 ‘무’를 무씨의 ‘무’로 보았던 것이다. 측천무후 사후, 다시 중원은 당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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