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도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남겼던 한해다. 가까운 일본에선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가를 여실없이 보여주었고 사막의 열풍이 부는 더운 나라에선 민주화의 염원이 하늘을 찔러버렸고 국내에서는 한미FTA를 비롯하여 거의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코메디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준 그런 한 해였다. 연초에 계획했던 일들은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는지, 늘 한해의 끝자락에서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목표를 향해서 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성취라고 느끼며, 올해의 책 10권을 소개한다. 여성농업인 여러분의 올해 기억속에 남는 책, 마음을 울린 책들은 어떤 책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

강신주 지음|사계절|346쪽|1만7800원
“욕쟁이 할머니의 식당에서 느끼기 쉬운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이 어떤 삶의 문맥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섬세하게 읽어내야 한다.”
현학적이고 고답적인 인문학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적용 가능한 철학적 어드바이스를 전한다. 라이프니츠·니체·스피노자·원효·데리다·한비자 등 동서양 철학자들의 인문 고전을 통해 그들 사유의 핵심이 현실적인 삶의 고민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장자(莊子)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대학 강단보다는 일반인들을 만나 소통하는 대중 아카데미에서 주로 강의해 왔다.

7년의 밤

정유정 장편|은행나무|524쪽|1만3000원
정유정의 장편소설 ‘7년의 밤’이 돌파한 것은 사회적·문학적 편견.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은 반드시 분리되어야 할 샴쌍둥이라는 문학적 오해, 작가는 평론가나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회적 통념을 깨트린 모범사례다.
정식 문학공부 한 번 받은 적 없던 이 전직 중환자실 간호사 출신의 작가는, 강력한 이야기 하나만으로 독자들에 대한 구애(求愛)에 성공했다. 어쩌면 당연한 정공법인데도, 그 이전의 성공 사례를 꼽기 드물다는 점에서 이 책이 지닌 함의는 강력하다.스릴러의 외양을 지닌 ‘7년의 밤’은 한 소녀를 죽게 한 뒤 죄책감으로 미쳐가는 사내와, 딸을 죽인 범인은 물론 범인의 아들에게도 사적 복수를 감행하겠다는 소녀 아버지와의 대결이 핵심 서사. 서사의 스케일은 거대하고, 디테일은 치밀하다.
그리고 이 대중문법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드러난 사실과 숨은 진실 사이의 간극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평온하다고 착각했던 일상으로 다가와 느닷없이 따귀를 때리는 운명이라는 놈에 대해, 그리고 인간은 그에 맞서 어떤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 있는지에 대해. 바로 이 대목이 작가 정유정의 문학적 야심이다.

스티브 잡스

월터 아이작슨 지음|안진환 옮김|민음사|925쪽|2만5000원
‘i sad’. 지난 10월 5일 애플의 공동 창업주 스티브 잡스가 사망했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전 세계적 애도 물결이 일었다. “다르게 생각하라”는 명언과 매킨토시 PC,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같은 혁신적 IT 제품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 영웅의 빈자리를 아쉬워하는 물결이었다.
10월 24일, 전 세계에서 동시에 월터 아이작슨의 평전 ‘스티브 잡스’가 나오자 신드롬은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평전은 일방적 미화(美化)와 과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잡스 본인과 가족은 물론 동료와 적, 과거 애인까지 100여명을 직접 인터뷰해서 구성한 ‘스티브 잡스’는 생생한 민얼굴의 잡스를 보여줬다. 암까지 이겨내겠다고 달려들었던 무서운 집념과 결점을 용납하지 못하는 완벽주의, 힌두교와 선불교 등 동양 사상에 심취하면서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융합을 이뤄낸 한 천재의 모습과 함께 모순 덩어리인 ‘인간 스티브 잡스’가 그대로 노출된 것.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나는 필터가 없는 사람이야” 하며 인정사정없이 직원을 해고하고 동료 가슴에 대못을 박은 사람.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면서도 “기부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한 냉혈한 같은 면모에 대한 서술은 오히려 그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2만5000원으로 비교적 고가이나, 출간 2개월이 안 된 16일 현재 국내에서만 42만권이 팔렸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김난도 지음|쌤앤파커스|320쪽|
1만4000원
작년 12월 24일 출간 이후 51주 동안 150만권 넘게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시·소설·실용서를 제외하고 한국인이 쓴 교양서가 100만부 넘게 팔린 건 2000년대 들어 처음이다. 저자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이만큼 팔릴 줄 나도 몰랐다”고 했다. 그만큼 한국 젊은이들이 아프다는 뜻인지 모른다.
김 교수는 “한국인의 평균 연령이 80세쯤 된다 치면, 80세 중 24세는 아침 7시 12분”이라면서 “나태를 즐기지 말라. 은근히 즐기고 있다면 대신 힘들다고 말하지 말라. 몸을 움직여 운동하고, 술 먹지 말고, 그것이 무엇이든 오늘 하라”고 썼다. ‘아프니까…’ 돌풍에 출판계는 환영과 당혹이 엇갈렸다. 이 책 구매자는 10명 중 7명이 20대다. “요즘 20대는 책 안 읽는다”지만 바로 그 20대가 ‘21세기 첫 국산 밀리언셀러’를 탄생시켰다.

디퍼런트

문영미 지음|박세연 옮김|살림Biz|327쪽|1만5000원
재미교포 2세로 하버드 경영대학원 종신교수인 저자는 오늘날 기업들은 ‘차별화의 대가(大家)’가 아니라 ‘모방의 대가’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더욱 비관적인 것은 “자신들이 지금 만들어내고 있는 미묘한 차이들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나머지, 끊임없이 차별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고객에게 직접 외진 상점까지 찾아와 물건을 직접 조립하게 하고(이케아), 딱 6가지 메뉴만을 고집하며(인앤아웃버거), 차가 얼마나 작은지를 더 강하게 광고하는(미니쿠퍼) 기업들처럼 시장을 다시 짜고 수요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차별화’의 길을 가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장편|창비|355쪽|1만1000원
김애란의 장편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은 2011년 한국 문학의 이중장부였다. 한 편에선 20만 명 가까운 독자들이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며 환호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예외적 주인공에 대해서는 예외적 감동만이 가능하다”며 “진정한 장편소설로 볼 수 없다”고 격하했다.

17세에 80세의 몸(조로증)을 지닌 ‘가장 늙은 자식’과 그 소년을 17세의 나이로 가졌던 ‘가장 어린 부모’의 사랑과 이별 드라마. 젊은 독자들은 조로증 아름이에게서 미래가 막혀 있는 자신들의 세대를 읽었고, 이 조숙한 주인공의 소설을 자신들의 장편으로 동의했다. 반면 인물과 서사 양 축에서 세계관의 대립과 충돌로 장편을 읽어왔던 기성세대들은 이 작품을 “단편의 확장”으로서 의심했다.

한글의 탄생

노마 히데키 지음|김진아 외 옮김|돌베개|447쪽|1만5000원
일본인 한국어학자가 한글 창제의 언어학적·역사적·사상적 배경과 그 의미를 고찰한 역작이다. 책은 한글 창제 이전부터 있어 왔던 수천년 동안의 문자생활 및 환경을 설명하고, 조선의 임금 세종과 학자들이 탁월한 분석력과 창조력을 통해 어떻게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냈는지를 꼼꼼하게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창제된 한글이 사람들의 손에서 문장이 되고 텍스트가 됨으로써, 단지 하나의 문자 체계가 아니라 기존의 지식 체계를 뒤흔들어 놓은 존재로 등장했다면서 이를 ‘지(知)의 혁명’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도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 글자 탄생의 경이로운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았다.

닥치고 정치

김어준 지음|푸른숲|336쪽|1만3500원
“천안함은 원인이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나라 우파는 원시인을 설명하는 수준에서 100% 해석되며, 과거 군사정권은 조직폭력단이고….” 이런 식으로 빠르게 이어지는 문장들 끝에 저자는 독자를 향해 우렁차게 외친다. “밥줄 때문에 입을 다물면 스스로 자괴감 들어. 지금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건 위로야. 쫄지 마! 떠들어도 돼, 씨○.”  김어준이 주요 멤버로 참여하는 인터넷 방송 ‘나꼼수’와 마찬가지로 이 책도 지지자에겐 격렬한 열광을, 반대파에겐 극단적 혐오감을 촉발한다. 10월에 출간해 두 달 만에 35만부 팔렸고 12월 들어선 각종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1위에 올라 있다. 저자의 논지에 찬성하건 반대하건, 2011년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골목 안 풍경 전집

김기찬 사진|눈빛|592쪽|2만9000원
담배 피우는 할머니, 노상 방뇨하는 할아버지, 무거운 짐을 이고 터덜터덜 걷는 아줌마, 남루한 골목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들…. 사진가 김기찬(1938~2005)은 1968년부터 평생에 걸쳐 가난한 지붕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은 달동네를 찍었다. 그가 남긴 사진집 6권과 미공개 유작 34점을 모아 전집으로 묶었다.

저자는 서울 중림동·도화동·행촌동 일대를 주로 찍었다. 그 사이 아이가 어른 되고, 어른이 노인 되고, 노인이 세상을 떴다. 저자는 평생 골목을 찍겠다고 다짐했지만, 재개발 사업이 번지면서 달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골목 안 사람들은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 갔다. 그는 그 점을 못내 쓸쓸해하다 세상을 떠났다.

흑산

김훈 장편|학고재|416쪽|1만3800원
자유와 영혼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고결한 영혼’도 있고, 현세에서 승리를 구가하는 ‘타락한 영혼’도 있다. 둘 다 승리자다. 하지만 작가 김훈의 관심은 늘 이 양 극단 사이의 어느 지점. 육신을 초개같이 버려 순교도 할 수 없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배교도 차마 할 수 없었던 ‘비루한 영혼’들이다.
‘흑산’의 시공은 천주교 박해의 절정기였던 19세기 전반부. 조용히 배교한 뒤 흑산도에서 물고기나 들여다보고 살았던 정약전을 중심으로, 작가는 스펙트럼의 양 극단 사이에 있는 약육강식의 군상을 비정한 언어로 그려낸다. 작가가 신뢰하는 것은 신념의 언어가 아니라 사실의 언어. 데뷔작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이래 이 원칙은 한결같다.

그밖에...

세계 2대 종교가 격돌한 십자군 전쟁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십자군 이야기 1·2’(시오노 나나미, 문학동네)는 역사적 배경과 명분뿐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의지도 드라마틱하게 살려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박경철, 리더스북)은 자아찾기·사회인식·시간활용·글쓰기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법을 제시한다.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신정근, 21세기북스)은 논어를 101가지 주제로 나누어 원문의 의미를 풀이하고 있다. ‘다산의 재발견’(정민, 휴머니스트)은 1801~1818년 강진 유배 시기 다산의 육성을 담았던 친필 편지를 찾아내 연구하고 정리했다.

‘로지코믹스’(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외, 랜덤하우스코리아)는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이 수리논리학자로 일세를 풍미하기까지의 여정을 만화로 흥미롭게 그려냈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니콜라스 카, 청림출판)은 인간이 디지털 기기에 종속되어가며 잃어가는 것들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저녁의 구애’(편혜영, 문학과지성사)는 도시 문명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을 하드보일드한 문체에 담아온 소설가 편혜영의 단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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