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초보은(結草報恩).
풀을 엮어 매어 죽은 뒤에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을 이르는 말로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이 연잇는 봄날에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되는 고사성어다.

50이 넘은 나이. 나의 친구는 노래방에만 가면 흘러간 가요에다 틈틈이 갈고 닦은 젊은이들의 신곡 몇 곡 정도는 막히지 않고 곧잘 부른다. 그런데 그 친구가 못 부르는 노래가 있다. 음정이 유난히 높다거나 박자를 따라가기 힘든 곡이 아니다. 가사에 ‘어머니’가 들어간 노래들이다. 예를 들자면 ‘불효자는 웁니다’라든가 ‘어머니 전상서’ ‘비 내리는 고모령’ 같은 노래다.

그 친구가 그런 노래를 못 부르는 이유는 그런 노래를 부를 때마다 매번 흐느끼기 때문이다. ‘어머니…’만 나오면 2~3초 이내에 목이 메고 곧바로 흐느끼니, 좌석 분위기를 망칠 뿐 아니라 본인도 대책 없이 민망해지기 때문이다. 술이라도 좀 취한 날엔 증세가 더 심해진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아예 그 친구한테 ‘어머니’란 가사가 들어간 노래는 청하지도 않고 들어볼 수도 없다.

환갑을 멀리 내다보는 나이지만 그가 ‘어머니’란 가사만 나와도 눈시울을 적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효심이 깊어서일까? 그의 고백대로라면 그건 효도가 아니라 거꾸로 부모님 살아생전 남보다 더 불효가 많았고 후회할 게 많아서다. 만약 ‘후회’가 앞에 온다면 인간은 실수, 불효 같은 뒤늦게 참회할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처럼 효도는 부모님 살아생전 내 앞에 ‘계실 때’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말로나 생각으로는 ‘때 맞춰 해야지’ 하면서도 늘 때늦은 후회로 남는 게 효도다.
어버이날, 어머니 노래를 못 부르는 속죄와 자책의 후회를 막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효도란 걸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어르신들을 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당부를 드리곤 한다.
“오늘 집에 가시거든 자식들에게 용돈 액수 올리라고 꼭 이야기하십시오.” 그러면 어르신들의 눈빛 속에 ‘자식도 어렵게 살아가는데 애처롭고 안쓰러워서 어떻게 용돈 더 올리라고 하느냐’는 눈치가 역력하신 느낌을 받는다. 그럴 때는 이렇게 부추긴다.

“자식이 잘 살고 복 받게 하려면 유산 주고 애 봐 주는 것보다 효도하게 만드는 게 더 낫습니다.”라고.
매달 안 빼먹고 용돈 드리는 것도 하나의 습관처럼 계속 반복시키면 나중엔 당연한 의무로 길들여지는 법이다. 아직 내 호주머니에 돈이 남아 있고 팔에 회초리 들 힘이 있을 때 ‘용돈 내놔라!’ 해야 그나마 몇 푼이라도 얻어낸다. 애처롭다고 ‘나중에 형편 필 때 받지’ 하고 미루다가 내 주머니 마르고 힘 빠진 뒤에 용돈 타령 하면 그때는 이미 자식들은 세금내는 기분이 돼 선선히 내놓길 꺼린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지난 어버이날에 받았을 용돈도 기념일 이벤트 경품 같은 일회성 효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 용돈 입금 날짜 까먹지 않게 자동이체계좌를 만들어서라도 자식을 제대로 효도하게 만들어야 한다. 머뭇거리고 안쓰러워하면 안된다. 그런 여린 사랑은 오히려 효도할 기회를 빼앗아 결과적으로 자식에게 하늘의 복을 받을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것이다. 과감히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약간 적다 싶게 받아왔다면 이번 어버이날에 맞춰 파격적으로 더 올리는 것도 좋다.

오늘날, 떨어져 사느라 며느리 밥상 한 번 변변히 못 받아 먹는 이 시대에 용돈 인상을 쭈뼛거리다 세상 떠난 뒤 자식이 노래방에서 목메어 울게 해 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어버이날을 보내며 생각해 본 용돈과 효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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