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민족 위해 죽으면 죽으리이다”

  
 
  
 
왕 중의 왕, 크세르크세스
기원전 480년경, 페르시아 왕국(지금의 이란)은 ‘크세르크세스’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의 왕국은 인도 북부에서 파키스탄을 거쳐 중동 전체와 아프리카의 이집트, 에디오피아 까지 아우르는 엄청난 영역의 제국으로 총 127개의 ‘도’로 나누어 져 있었다.

왕은 재위 3년째를 맞아 각 도의 수령과 방백, 귀족을 모두 불러 들였다.
“나는 이 대제국의 황제로서 내 백성들의 자긍심을 높이려 한다. 앞으로 6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왕도에서 잔치를 열어 이 영화로운 나라의 부유함과 혁혁함을 나타내리라.”
청, 홍, 백색으로 물들인 대리석 위에 앉아 금잔에 술을 따라 마시면서 각 도의 방백들은 왕을 찬미했다. 백성들도 왕과 제국의 부강함을 마음껏 즐겼다.

잔치 7일째가 되던 날, 왕이 만취했다. 그는 내시를 불러 명했다.
“왕후 ‘와스리’를 불러라. 내 아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멀리서 온 지방의 수령들에게 보여주고 싶구나.” 그러나 왕비의 대답은 앙칼 맞았다.
“내가 그 자 들의 구경거리라더냐. 못 간다고 아뢰어라.” 미리 큰 소리쳤다가 체면이 상한 왕은 진노했다. 성질이 나서 길길이 날뛰었다.

이때 평소 왕비와 사이가 좋지 않던 간신들이 왕에게 들러붙었다.
간신들의 간언에 따라 왕은 왕비를 폐하고 말았다.

유대인 에스더, 왕후에 오르다
폐위 3년 후인 기원전 480년, 왕은 그리스 원정을 갔다가 ‘살라미스 해전(海戰)’에서 대패해 깊은 상심에 빠졌다. 왕은 아름다운 왕비가 그리워졌다. 그는 왕비를 다시 복위시키려 했으나 다시 그때의 신하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왕비가 복위하면 왕비를 내치라고 한 자기들을 가만히 두겠는가. 그들은 다른 제안을 했다.

“존귀하신 왕이시여. 처녀들을 불러들여 그들을 정결케 하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 새로운 왕비를 맞이하소서.”
왕은 궁녀를 관장하던 내시 ‘헤개’에게 명해 새 왕비의 후보자들을 모아들이라고 했다. 전국 각 도에서 재색을 겸비하고 총명함을 뽐내는 수 백 명의 처녀들이 왕도로 모였다.

그녀들은 무려 1년 동안 ‘정결식’을 견뎌내며 심사를 받았다. ‘정결식’이란 당시 페르시아 제국 고유의 풍습으로 6개월간은 몰약과 6개월간은 향신료를 몸에 발라 세상에서의 때를 씻고 고귀한 왕에게 가기 위한 정결한 몸을 만드는 의식이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내시 ‘헤개’의 눈에 확 띠는 한 처녀가 있었다. 그 처녀를 보자 그의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헤개는 처녀를 왕에게 인도했다.
왕은 마치 빛을 보는 듯했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우면서도 기품 있는 여인이 있다니…와스리는 비할 바가 아니다.’왕은 당장 성대한 잔치를 열고 그녀를 왕후로 맞이했다. 유대인인 그녀의 이름은 ‘에스더’였다.

삼촌 ‘모르드개’
에스더에게는 ‘모르드개’라는 현명한 삼촌이 있었다. 그는 왕후 간택 소식에 에스더라면 무난히 왕후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는 에스더에게 당부했다.
“왕께서 굳이 집요하게 묻지 않는다면 네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 소수민족인 우리가 그걸 밝히면 다른 민족들의 견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헤개도, 크세르크세스 왕도 그녀가 어느 민족인지는 묻지 않았다.
에스더가 왕비가 된 후, 모르드개는 왕궁의 출입문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게 됐다. 그는 강직하고 충직했다. 모르드개는 어느 날 우연히 왕의 내시 두 명이 왕의 살해 계획을 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에스더에게 알려 왕의 목숨을 지켜주었다.

이 일은 페르시아의 역사책인 ‘궁중 역대기’에 기록된다. 모르드개의 이름은 올랐으나 그가 공치사를 극구 사양했으므로 왕은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측근들에게만 상을 내렸다.

간신 ‘하만’
왕은 ‘하만’이라는 이민족(페르시아인이 아니라는 뜻)출신의 재상을 최고 지위에 올려놓았다. 워낙 처세에 능하고 왕의 비위를 잘 맞추던 하만은 최고위 직에 오르자 자기 밑의 모든 대신들에게 그가 지나갈 때 무릎을 꿇고 절하도록 했다. 왕은 그런 일은 개의치 않았다.

거만해 질대로 거만해진 하만이 궁중 문을 나설 때 모든 자들이 꿇어 엎드리는데 유독 미동도 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바로 ‘모르드개’였다.
“저 미친놈이 어느 앞이라고 절을 하지 않는 것이냐?”

“신하들도 위아래가 있겠으나 절은 오직 왕께서만 받아야 하는 것이오. 나는 불의한 일에 동의할 수 없소.” 모르드개는 강직했고 원칙을 지켰으나 이 ‘자존심’이 유대민족에게는 곧 ‘멸망’의 위기로 다가온다.
신으로 모시며 타민족의 신앙을 우상숭배라 하여 멸시하고 자기들만 잘났다고 하는 유대인이었다. 게다가 하만의 조상과 모르드개의 조상은 500년 전부터 싸워왔던 앙숙 중의 앙숙 씨족이었다. 하만은 이를 빌미로 아주 위험한 생각을 한다. “유대인들을 제국 내에서 쓸어버리겠다.”

멸절(滅絶)의 위기
하만은 곧 유대인들이 저지른 죄상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조작되고 날조되고 과장된 범죄 사실들을 더하자 유대인들은 거대한 범죄 집단처럼 됐다.

“거룩한 왕이시여. 그들을 더욱 그냥 놔둬서는 안 되는 것은 그들은 여호와라는 자기들의 신을 모시며 다른 신을 믿는 민족들은 반드시 멸망한다면서 왕까지 깔보고 능멸해 언제나 반역만을 도모하고 있습니다.”라며 왕의 가장 민감한 부분, 즉 ‘반역’을 들먹였다.

왕은 하만의 기획을 보고 ‘유대인 멸절’을 허락했다. 하만은 제국의 구석구석까지 각 지역의 언어로 된 어명을 파발마로 보냈다. 거기에는 ‘12월 13일 유대인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며, 그 재산은 그들을 도륙한 자들이 가져도 좋다’라고 쓰여 있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만의 이야기를 들은 왕의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모르드개는 통곡하며 왕께 자기 민족을 살려달라고 호소했으나 그 목소리는 왕의 귀에까지 닫지 않았다.

그래도 ‘살육 칙령’을 내린 왕은 마음이 심란해 에스더를 찾았다. 에스더는 “마음이 심란하면 궁중 역대기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왕은 최근의 일부터 역순으로 읽어나가다가 두 내시로부터 자신을 구해낸 모르드개라는 자의 이름을 발견했다. 이런 날을 대비해 에스더가 반드시 기록해 놓으라고 했던 삼촌의 이름이다.

왕은 생각했다. ‘그런데 모르드개도 유대인이 아닌가! 하만의 말과는 영 다르지 않은가.’ 그는 다음 날 아침 당장 사람들을 보내 모르드개에게 상을 내리고 왕의 옷과 말을 내주었다. 에스더는 왕의 미묘한 심경변화를 간파했다.
에스더는 즉시 측근을 불렀다. “곧 도성 안에 있는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나를 위해 3일 씩 금식하면서 정신을 정결히 하고 신께 기도하라고 하세요. 나도 3일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기도한 후 규례를 어기고 왕께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아무리 왕비라도 왕께 먼저 나아가는 것은 금기였다.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불경죄였던 것이다. 에스더는 몸과 마음을 정결히 다듬은 후 3일이 지나 잔치를 베풀고 왕과 하만을 초대했다.

“위대하고 자비로운 왕이시여. 사실 저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은 왕을 속인 적이 없습니다. 왕의 목숨을 구한 모르드개도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모함과 사적인 원한으로 저와 제 민족을 멸절하려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탐욕해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못된 궁리로 남을 음해해 거룩하신 왕을 속였습니다.”

에스더는 그동안 샅샅이 조사한 하만의 비리와 악행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노하여 벌떡 일어나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하만이 에스더가 앉아있는 곳으로 와서 목숨을 구걸했다.

너무 다급해진 하만은 앉아 있는 에스더의 무릎을 잡고 애걸복걸했는데 이를 왕이 목격했다.
“저 자가 내 앞에서 왕비까지 강간하려하는 것이냐? 저 자를 당장 형틀에 매달아라.”

이어진 핏 줄
하만은 처형되고 집안도 멸했으나 더 급한 것이 있었다. 이미 칙령을 가지고 떠난 무수한 파발마들이었다. 왕은 즉시 유대인 살육의 명을 거둬들이도록 하고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불러 깊이 사과했다.
제국 내의 유대인들은 아무도 화를 입지 않았다. ‘애통이 기쁨으로 변한’ 12월 13일, 14일은 유대인들에게 대대로 이어져 ‘부림절’이라는 기념일로 경축됐다.
기원전 480년 경, 총명하고 아름다운 에스더라는 유대 여인은 이렇게 민족을 구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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