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웅들도 나를 거부하지 못한다”

  
 
  
 
팜므파탈(femme fatale)이란, 저항할 수 없는 관능적 매력과 신비하고 이국적인 아름다움으로 남성들을 포로로 만들고 치명적인 불행을 불러 남성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여성들을 말하는 프랑스어 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도 일컫는 그녀들의 행적을 ‘달콤한 유혹은 치명적 독배(毒杯)가 되어’라는 소주제로 추억하려 한다.


여신, 탄생하다
로마의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이요 고대 서방세계의 지배자인 ‘카이사르’ 앞으로 둘둘 말린 양탄자 하나가 바쳐졌다.
“이것이 무엇인가?” 카이사르는 수비 병사들에게 물었다.

“집정관님께 드릴 귀한 선물이라고 이 나라의 여왕께서 보낸 것입니다.”
큼직한 양탄자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호기심이 발동한 카이사르는 양탄자를 풀라고 했다. 양탄자가 서서히 풀리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눈이 동그래지며 탄성을 질렀다.
“아~아니! 이럴 수가!”

누구보다도 놀란 이는 집정관 카이사르였다. 양탄자에서 나온 것은… 상체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 빛나는 미모를 자랑하며, 흡사 여신이 탄강(誕降;임금이나 성인이 태어남)하는 것 같은 황홀한 자태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당신은 누구요?”

“저는 ‘클레오파트라’라고 합니다. 저는 이 나라 이집트의 여왕으로 평소 로마의 지배자요, 세상의 지배자인 카이사르님을 흠모해 왔습니다. 제가 추하지 않으시거든 저를 용납하소서.”
카이사르의 눈에는 비너스 여신이 지상에 내려온 것 같았다.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뭔가 정치적 의도가 있다. 강한 자의 편에 붙어 뭔가를 얻어내려는 일종의 술수요 처세방식이겠지…. 이 여자도 뭔가 목적이 있어서 나에게 온 것 일테지만….’

그러나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을 갖추었던 카이사르도 이 여인을 마다할 수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고대 서방세계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한 ‘위대한’ 카이사르도 말이다.

멀고 먼 여왕의 길
때는 서기 50년 경, 지금으로부터 약 2050년 전의 일이다. 당시 이집트는 옛날 그리스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기원전 323년)의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배층은 이집트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계의 왕가였던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기원전 51년 숨을 거두며 이렇게 유언한다.
“내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네 누이인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해 이집트를 공동으로 다스려라.”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서 남매나 사촌 간의 결혼은 흔한 일이었다. 18살 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이제 열 살 밖에 안 된 ‘동생’과의 결혼이 한심했다. 공동통치라는 희한한 권력은 곧 말썽이 생겼다.

클레오파트라 측근과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측근 간에 알력이 생기며 서로 반 씩 차지하고 있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음모, 살해, 공갈 등이 궁 안에서 난무했다.
결혼 초기에는 아무래도 나이가 위인 클레오파트라 쪽이 유리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면서 힘은 남편 쪽으로 기울어 갔다.

‘나는 절대로 권력을 남편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명실상부한 ‘여왕’으로 군림해야 해.’
그러나 한 번 몰리기 시작한 클레오파트라와 측근은 왕 측의 파상공세를 이기지 못했다. 결국 공동 왕에 오른 지 3년 만에 그녀는 머나 먼 북방의 ‘시리아’로 피신하는 신세가 된다. 여왕에의 길은 멀어 보였다.

카이사르, 이집트에 입성
로마 제국 내에서는 내전이 일어났다. 최후의 일인자 자리를 두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간에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카이사르에 패퇴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 가서 군사지원을 부탁하려고 알렉산드리아(이집트의 왕궁이 있는 곳)로 갔다. 그러나 이집트 왕은 이를 수상히 여겼다.
‘저 놈이 여기 와서 클레오파트라 잔당들과 결탁하면 내가 곤란해진다.’

카이사르에 버금가는 로마제국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보낸 자객에 의해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다(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가 죽은 지 일주일이 안 돼 카이사르의 군대가 이집트에 들이닥쳤다. 카이사르의 압도적 군사력 앞에 이집트 왕실은 무력했다.

“오늘부터 이집트의 모든 군사들은 무장을 해제한다. 당분간 이집트는 우리 로마가 보호하겠다.”
카이사르의 장기적 구상은 이집트를 로마의 식민통치령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곧 클레오파트라의 귀에도 들어갔다.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잠입한 클레오파트라에게도 계획은 있었다. ‘그래 카이사르의 힘을 이용해 남편에게 빼앗긴 왕권을 되찾는 거야.’
왕궁 내의 소식통을 통해 카이사르가 궁 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안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충복들을 불렀다.

“왕궁에는 왕도 함께 있기 때문에 내가 얼굴을 보이며 들어갈 수는 없다. 자 너희들은 어서 부드러운 양탄자 하나를 준비해 와라. 나를 양탄자에 말아 넣고 선물인 것처럼 꾸며 카이사르 앞에 내려다 놓으면 된다.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클레오파트라는 하늘하늘 하고 요염한 이집트 전통 치마에 상체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반라(半裸)의 몸으로 양탄자에 말렸다. 이 운명의(?) 양탄자는 그렇게 카이사르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영광과 몰락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에게 한 눈에 반했다.
로마제국의 막강한 힘도,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는 그의 무한 권력도 어쩌면 이 여인이 주는 쾌락과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했다. 그는 이집트의 전권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주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대반격이 시작됐다.
“왕은 호시탐탐 당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를 제거해야 합니다.”그녀는 카이사르에게 왕을 살해할 것을 종용했다.

별 저항 없이 이집트를 정복한 탓에 피를 볼 일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카이사르는 고민했으나 이렇게 사랑스런 연인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이런 낌새를 알아채고 몰래 탈출해 군사를 집결시켰다. 마침내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카이사르 군은 생소한 지리와 익숙하지 않은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전에 고전을 거듭했으나 그들에게는 최고의 전략가 카이사르가 있었다.
초기의 우세를 지켜내지 못하고 이집트 왕은 카이사르 군에게 무릎을 꿇었다.

‘바보 같은 녀석! 네 놈의 잘못은 나에게 대적하려 했던 바로 그 어리석음 이란 말이다.’
클레오파트라는 무덤덤하게 동생이자 남편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처형을 지켜보았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죽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막내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의 공동통치자로 임명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4세의 나이는 5살에 불과했다.

완전히 형식에 불과한 공동 왕을 자기 측근들의 감시 속에 남겨두고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로 들어갔다. 로마로 들어서는 개선장군 카이사르에게 로마시민들의 열렬한 환호가 이어졌다. 세계의 중심지에, 최고의 권력자와 함께, 무수한 인파의 환영을 받으며 들어서고 있는 클레오파트라. 그녀의 앞날에는 영광과 화려함과 넘치는 권력과 보석들로만 가득할 것 같았다.

카이사르와 로마에서 꿈같은 세월을 보내며 아들 ‘카이사리온’까지 낳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4년 3월 어느 화창한 봄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슬픈 소식을 듣는다.

남편 카이사르가 살해된 것.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망연자실해 있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다가 올 운명은 뻔했다. 그것은 바로 카이사르를 살해한 반대세력들에 의한 비참한 죽음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와 슬픔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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