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

가을의 한 중간입니다. 일교차 큰 맑은 날이 한 달가량 계속 됩니다. 이른 아침엔 손이 시리게 싸늘하다가도 아침 먹고 조금 지나면 이내 따뜻해져서 일하기 좋습니다. 한낮으로는 덥기까지 하고요. 바쁠 것도 별로 없는 농사지만 엊그저께 나락 베어버리고 나니 마음이 한갓집니다. 바람 탓에 쭉정이가 많이 생겨서 거두어 놓고 보니 질이나 양이 작년에 못 미칩니다. 말려서 방아 찧어 보면 도정수율은 더욱 낮아지겠지요. 하지만 작으나 많으나 논일 끝내고 나니 한 해 농사가 마음으로는 다 마무리 된 것 같습니다.

오늘은 들깨를 베었습니다. 심지 않은 들깨를 베는 것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심지 않았는데 어떻게 베냐고요? 이야긴즉슨 이렇습니다. 작년에 탄저병 때문에 중간에 뽑아내버린 고추밭에 들깨를 심었습니다. 늦게 심은 탓에 잘 되진 않았어도 들깨를 꽤 털어냈지요. 그 들깨는 해를 넘기고 최근에야 기름을 짜서 여러 군데 나누고도 아직 반이나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올해는 굳이 들깨를 심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지요. 작년 들깻대는 작두로 썰어서 화단에도 뿌리고 밭에도 뿌려두었는데 그게 여름이 되자 그야말로 뿌린 대로 싹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여름내 깻잎 뜯어먹고 더러 뽑아내기도 하고 밭엣 것은 그대로 두었더니 풀과 함께 어울려서 잘 익었던 것입니다.

저는 가을 농사일 중에서 들깨 베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어릴 때도 들깨 냄새가 싫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니까 들깨를 밭 한군데 정해서 심지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거의 대부분 고구마밭둑에 심고 고구마 밭 가운데에는 키 큰 수수나 옥수수를 심었습니다. 고구마가 음지 식물이어서 다른 작물로 해서 그늘이 생겨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어른들은 경험으로 아셨던 것이지요. 적은 땅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지혜이기도 하고요. 모두 다 이렇게 들깨를 심으니 이른 아침에 밭엘 가려면 밭둑으로 쏠린 이슬 맺힌 들깻잎 때문에 아랫도리  옷은 늘 홈빡 젖어야 했습니다. 또 밭에서 돌아올 저녁나절 때도 들깨사이를 거쳐 와야 하니 어머니의 치마나 ‘몸빼’에서는 가을이면 항상 들깨 냄새가 났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형제의 막둥이로 어머니 치마폭에서 오랫동안 자란 제게 들깨 냄새는 가을의 냄새이자 어머니의 체취로 가슴에 새겨진 모양입니다.

처음엔 낫을 잘 벼려서 베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풀을 매다 만 참깨 밭에서 풀과 함께 큰 것이라 줄기가 가늘어지고 이리저리 뒤엉켜서 하나하나 베어내기가 참 더디었습니다. 그래도 한참을 더 베다가 나중에는 낫을 던져 놓고 손으로 줄기를 꺾어보았습니다. 생각 외로 들깨도 콩대처럼 똑똑 잘 꺾이더군요. 그래 이제는 약간 짜증이 나려던 것이 재미로 변했습니다. 낫으로 벨 때는 허리를 구부리고 선 자세로 해야 해서 허리가 몹시 아팠는데 이제는 앉아서 해도 되었습니다. 비온지도 오래되고 가을이라 풀도 마르는 터에 그 풀밭에 무릎걸음으로 들깨 냄새를 맡으며 들깨를 하나하나 꺾어서 가지런히 손에 쥐니 마치 무슨 꽃을 꺾어 든 것 마냥 행복해졌습니다. 심지 않았어도 거두게 되었으니 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야금야금 일을 하니 저도 모르게 노래 흥얼거리기 시작하더군요.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퍼뜩 ‘사람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농사란 어떤 형태의 것이어야 하나’에 생각이 멈춰졌습니다. 수십 년 농사를 지어왔어도 한 번 느껴보지 못한 이 감정은 어디서 생겨서 왔는지, 최근에 기분이 좋아질 만한 농사외적인 요인이 혹시 있었는지, 일이 한갓지고 힘들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가을이기 때문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저쪽에서는 제 아내가 하나씩 익어가는 녹두를 따고 있었습니다. 태풍에 맞아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다가 뽑힌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포기해버린 녹두밭입니다. ‘그럼에도 남은 포기에서 녹두가 익어가니 땅은 얼마나 고맙고 경이롭나’ 따위의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은 꼬물도 없습니다. 잠깐 느꼈던 행복 속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에 붙잡혔다가 놓여나오며 제가 본 것은 수렵과 채취에 의존하던 원시시대의 모습이 투사된 것일지도 모를 저와 아내의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저는 내내 행복한 농사란 어떤 것인가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생각과는 다르게 농사를 지어왔지 않나 싶습니다. 실은 우리 의지가 비료나 농약, 농기계, 종자회사의 욕구를 관철시키는 쪽으로 흘러오면서 발전이라는 옷을 입었지만 농민을 불행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은 아닌지, 정도의 차이일 뿐 유기농도 예외일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과의 관계에서건 자연과의 관계에서건 소유냐 공유냐의 문제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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