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럭을 쓰고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적게 온다는 가을비가 우산을 써야 할 만큼 많이 왔습니다. 그새 한 달포 정도 비가 오지 않다가 온 비라 해갈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벼 베는 일도 거의 다 끝나가서 이번 비는 추수에 방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가을비 한번은 내복 한 벌이라더니 비 그치고 나자 추위도 찾아왔습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밤새 창문이 덜컹거리고 하늘엔 검은 구름장이 낮게 떠서 빠르게 흘러갑니다. 추위 때문인지, 스산해진 풍경 때문인지 조금은 몸이 움츠러들고 걱정스런 아침입니다.

이 비 전에 고구마를 캤으면 더 없이 좋았을 것을 그리 못한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땅이 굳어서 캐기는 힘들어도 마른 땅에서 캐야 고구마는 달고 맛납니다. 저장할 때 탈도 나지 않고요. 그러나 지금은 가뭄 끝에 물을 흠뻑 먹은 상태라 캐면 비닐하우스처럼 따뜻한 곳에서 여러 날 말려야합니다.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지니 잘 덮어주지 않으면 또 썩기 쉽지요. 저번에 고구마순을 뜯어서 한 솥 삶아 널었는데 며칠 후 한 솥 더 삶아 말리려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올해는 고구마순 말고는 말려둔 나물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토란도 심지 않아서 토란대도 없고, 호박 몇 포기 심은 것도 바람을 맞아서 풋호박 한 덩이 말려놓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고구마 순이나 많이 해놓자 하다가 그리된 것이지요.

발을 한 장 엮어서 말려보고 싶었습니다. 발은 보통 가로세로의 길이가 1미터, 2미터정도 되는 것인데 작년 겨울에 엮어두고 한 번도 쓰지 못한 쑥대로 만든 발은 서울에 사는 그림 그리는 친구가 와서 보고는 욕심을 내서 가져가 버렸습니다. 나물 말리려고 만든 것을 화실에 걸어 둔다나요. 저는 발에 무엇이 널어져서 햇볕에 마르고 있어야 보기 좋던데 그 친구는 그냥 걸어두고 보는 게 좋은가 봅니다.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는 것도 제 각각이긴 하지만서도 도구가 장식이 되는 것이 조금은 우습습니다. 헛간에서 바쁘게 곡식을 훑어야 할 홀태가 버젓이 안방에 들어가 벽에 들러붙어 조명기구 노릇이나 하고, 곳간에서 곡식이 담겨야할 항아리가 거실 탁자가 되는 세상을 저는 아직도 눈살 찌푸리며 보는 사람입니다. 격이 맞지 않은 것은 하여간에 살림을 살아낸 농경시대의 그 온갖 자부심 많은 것들이 이제는 현대인들의 한갓 노리개 장식품으로 변하는 것에 대한 씁쓸함과 반감 때문입니다.

아래채 바깥벽에 비가 많이 들이치는 까닭에 벽에 엮어서 둘러칠 요량으로 재작년에 베어둔 갈대가 발을 엮으려는 재료였습니다. 아래채 바깥벽을 그새 따로 다른 방법으로 방수를 한 까닭에 갈대는 쓰이지 못한 채 고스란히 저번 바람에 날아간 비닐하우스 한 편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그 자리에 헛간 대신으로 쓸 조그마한 비닐하우스를 하나 짓다가 갈대가 참 아까워서 발 엮을 생각을 한 것입니다. 갈대는 바닷물을 먹고 펄이나 조간대 위쪽의 자갈밭에서 자라는 것이라 잘 썩지 않고 가볍고 단단합니다. 겉껍질을 벗겨 버리면 아주 매끈하고 어여쁜 속살이 드러나는데 이게 약간 엷은 갈색을 띠어서 새로 엮어도 오래 묵은 맛이 날 것 같습니다. 이걸 한 아름이나 되게 다발로 묶어서 준비해 두고 엮을 날을 기다렸습니다.

굳이 발이 아니어도 곡식이나 나물을 널어 말릴 수 있는 것들은 저도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널어 말릴 것이 없는 게 문제지요. 아직도 제 어머니가 쓰시던 대광주리 채반이 마루선반에 켜켜이 얹혀있고 아버지가 엮어서 쓰던 것과 제가 모아둔 장 멍석이 10여장이나 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42년째이니 멍석의 나이가 저와 비슷할 테고, 어머니 가신지 12년째이지만 채반 광주리들도 30년 넘은 것들입니다. 대그릇들은 항상 쓰이는데 멍석만은 묶어두고 쓰지 않은지가 30년도 더 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농사지으면서 저도 써본 기억이 없으니까요.

그게 워낙 무겁고 드나들기 힘들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아스팔트 길 위에다 벼와 보리를 널어 말릴 때 수십 미터씩 되는 까만 나일론 멍석이 나오고 나서 짚 멍석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듯합니다. 한 필지에서 나온 나락도 50미터짜리 나일론 멍석 하나면 다 널어 말릴 수 있고 무게는 짚 멍석 반장 정도이니 누군들 그걸 안 쓸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 나일론 멍석도 이제 쓰지 않는 세상이 됐습니다. 곡식의 건조를 지금은 거의 대부분 건조기에 가져다 넣어 버리니까요. 이런 현상들은 결국 자본과 기업의 요구가 관철되는 것입니다. 비닐하우스 헛간을 정리하면서 아버지 때의 멍석과 제가 산 나일론 멍석이 똑같이 한구석에 박혀 호명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발 엮을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한 땀 한 땀 짚을 넣어가며 수놓듯 채워가던 멍석처럼 발도 그렇게 엮고 싶었습니다. 발은 가볍게 드나들기 좋아서 잘 엮으면 아마도  십여 년 두고 쓸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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