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저희 지역의 한 고등학교에 있는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얼마 전에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1, 2학년으로 이루어진 문학동아리를 지도하는데 학생들과 함께 찾아와도 좋겠냐는 전화였습니다. 제 사정이 허락되면 두 시간 정도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것이지요. 일이 바빠도 그런 시간이라면 기꺼이 응하는데 바쁘지 않은데 거절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여 어젯밤은 학생들과 함께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게 됐습니다.

저녁 여섯 시쯤 되어서 저는 만나기로 약속한 곳으로 갔습니다.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하기로 돼 있어서 식당으로 장소를 잡았는데 평일이어서 그런지 우리를 빼고는 손님도 거의 없어서 시끄럽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모두 여덟 명이었습니다. 서로 돌아가면서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와 인사를 하는데 학생들의 말속에 금방 제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의 실마리가 드러났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제 나름 할 이야기를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은 저의 일방적인 것이어서 학생들은 시간 내내 수동적일 수밖에 없지요. 학생들은 하나같이 시인을 처음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를 처음 본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입시공부 하느라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처지에서 여러분이라고 예외일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며 시인을 찾아온 것에 대한 깊은 감사와 기대를 보낸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라는 이야기로 흘러갔습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에 바로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이 강의의 삼분의 이는 너무 쉽게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때마침 저녁밥이 준비되어서 맛있게 먹는데 같이 온 선생님이 저를 배려하느라 반주 한 병을 시켜주었습니다. 선생님도 저를 대접하느라 학생들 앞이지만 한잔을 드셨고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시간이 끝나면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밤 열두 시 무렵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학과시간을 빼서 온 것이라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저는 ‘밥 잘 먹는 것이야말로 문학 공부다’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다시 학생들의 인사에서 찾아낸 이야기의 실마리 한 끗을 놓치지 않고 이어갔습니다. 학생들은 그러더군요. 시인이 대단한 존재인줄 알았는데 만나고 보니 그게 아니라고요. “그래서 실망들 했는가?” 묻자 “아니요, 양복 입으시고 어려운 이야기를 하실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러지 않아서요.” 그래서 저는 제가 왜, 어떻게 시를 쓰게 됐는지, 아니 그전에 왜 농사꾼이 되었는가와 농업을 대수롭잖게 여기는 현실을 어떻게 바꾸려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시를 위한 시인, 폼 재려는 시인이 아니었기에 역설적으로 여러분들이 찾아주는 시인이 되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마치 송곳이 나무를 꿰뚫고 들어가듯이 날카롭게 사물에 집중하며 녹슨 쇠를 몇 천도 끓는 용광로에 던져 넣어 강한 쇠를 만들듯 항상 전복적 사고방식을 가지라고 조금은 학생들에게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하다보면 학생들에게보다는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알 것 다 아는,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었다는 어른들 눈에서는 볼 수 없는 학생들의 순수를 볼 때마다 젊은 날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상투적인(!) 충동 때문인가 봅니다. 겨울방학에 꼭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학생들과는 헤어졌습니다. 상현의 밝은 가을 달밤 속을 차를 몰아 지나오면서 저는 약속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했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약속 혹은 타인과의 약속, 특히 다시 만나자는 그 수많았던 지나간 날들의 약속이 결국은 우리를 얼마나 사무치게, 혹은 허무하게 했던가. 약속은 하는 순간 이미 그러한 속성을 갖는 것이라고 했지만 아직도 우리는 날마다 가볍기 만한 약속과 헛된 열망을 하면서 사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젯밤 그렇게 마신 술이 병반쯤 되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몸 안에 약간 남아 있는듯해서 산책을 하듯 한 시간 가까이 걸었습니다. 산위로 이제 햇발이 막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집에 돌아오니 그새 일어난 아내가 아침을 준비하느라 그릇들 부시는 소리가 납니다. 아침 먹기 전에, 해마다 제 쌀을 사주시는 소비자 한분이 유기농 쌀겨를 보내달라고 해서 택배하나를 싸놓고 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에 쓰려고 그럴까?” “물에 개어 얼굴 마사지하면 좋대.” 그러면서 자기도 써본다며 한 봉지 담아놓습니다. “대체 여자들이란….” 저는 가볍게 웃어주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쓸데없는 짓 한다고 타박이나 했겠지요. 세월은, 아니 가을은 봄여름 동안의 무거운 시간을 지나온 우리의 삶도 가볍게, 가볍게 탈색시켜 버리는 중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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