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날이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노라니 손이 시린데 밤새 메마르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는지 바삭거리는 나뭇잎들이 마당 여기저기 휩쓸려 있습니다. 그새 비가 또 한 차례 와서 땅이 많이 젖어있지만 오늘은 서둘러 고구마를 캡니다. 잠깐 농협에 볼일이 생겨 아내와 함께 나갔다 와야 하는데 아내가 아침 설거지를 하고 방안에서 외출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마음이 급해진 저는 낫을 찾아들고 고구마 순을 걷었습니다. 금세 입었다 벗었다 하기 귀찮아서 작업복 아닌 외출복인 채 말입니다. 하긴 제가 아주 멀리 가는 일 아닌 이상 무슨 외출복이겠습니까. 날마다 일할 때 입는 험한 작업복 대신 입은 평상복일 따름이지요. 장갑을 꼈어도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손이 많이 시려서 자꾸만 오그라듭니다. 그러고 보니 입동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서리 온다는 상강 지난 지 열흘이 넘었으니 가을의 막바지인 셈이라 서서히 추워질 때도 된 것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으로서 늘 철을 헤아리지만 그 철을 헤아리며 계산을 하다가 저는 항상 이렇게 뒷북을 칩니다. 미리미리 일할 줄 모르는 게으른 사람의 본보기가 아마도 저 아닐는지요.

쉽게 끝나리라 생각했던 외출이 조금 길어져서 집에 돌아오니 열 시 반. 작업복 갈아입고 다시 밭으로 내달립니다. 예초기로 한번 쳐내고 순을 걷으면 편한데 겨울에 짐승 먹인다며 고구마 순을 달라는 형님의 부탁이 있어 그냥 걷었습니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다. 순이 이리저리 무성하게 많이도 뻗어 있어 뽑고 당기고 끊어내느라 씨름을 합니다. 제 아내는 순은 자기가 걷는다며 저보고는 캐라는군요. 조금만 센 일을 해도 왼쪽 팔뚝이 아파 고생하는 남편의 사정을 생각해준다는 것이지요. 흥, 저는 잠시나마 즐거운 코웃음을 웃습니다. 약한 여자의 힘으로 될법한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고맙지요. 내가 비록 한 팔을 못 쓴다 해도 남은 한 팔은 아직 자네 두 팔보다 못하진 않지. 호기를 부리고 나니 정말 오른쪽 팔에 힘이 솟아 아픈 왼팔 몫까지 하는 듯합니다. 남편, 특히 남자라는 것이 여자 앞에서는 이렇게 어리석기만 한 것인가 봅니다. 그래저래 웃으며 순을 둘이 다 걷었습니다.

이제 한 두둑씩 타고 앉아 고구마를 캐기 시작합니다. 잘 뽑히기는 해도 고구마에 흙이 많이 들러붙고 신발에도 들러붙습니다. 날이 가뜩이나 추운데 이러면 고구마를 잘 말릴 수 있을는지 걱정이 됩니다. 토방 따뜻한 곳에서 말린다 해도 여러 날이 걸리겠지요. 이럴 때는 비닐하우스가 제격이지만 올해는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저는 아내에게 버릇처럼 또 옛날이야기를 합니다. “하루 종일 순을 걷어주면 순은 가져올 수 있었어, 소 먹이려고 그러는 건데 한마지기 순도 마르면 짐으로 두 짐밖에 되지 않았다고.” 아내는 묵묵부답입니다. “하루 종일 고구마를 져 날라주면 삯으로 한 짐을 얻어올 수 있었지.” 마지막 지는 그 한 짐은 자기 집으로 가져가는 것이라 욕심껏 짊어졌습니다. 곡식하고는 다른 것이라 해도 결국은 겨울양식 대신이어서 싸다고만은 할 수 없는 품삯이지요. 나이 차이는 한 살밖에 나지 않지만 아내가 살았던 곳은 시골의 작은 읍이었던 까닭에 이런 사실들을 알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대답이 없는 것은 저의 말을 수긍한다는 뜻입니다. 제 아내는 본디 참 말이 적은 사람입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난 오후엔 저 혼자 메밀을 벴습니다. 날이 추운데다가 점심을 먹고 따뜻한 방 아랫목에 누우니 오전에 힘써 일한 피로가 밀려와서 몸이 자꾸만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저는 하마터면 깊이 잠들 뻔했다가 더 추워지기 전에 일을 마쳐야 되겠단 생각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만 아내는 모른 척 놔뒀습니다. 바람에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린 탓에 메밀 품세가 몇 달째 감아 빗지 않은 머리칼처럼 엉켜있었습니다. 낫으로 하나하나 추려 베다가 안 되겠어서 가위를 가져다 잘라보지만 그 또한 성에 차지 않고 일이 더디기만 합니다. 그래서 조금 덜 먹자 생각하고 쓸려진 결대로 우듬지 쪽만 낫으로 거듬거듬 베어서 한 아름씩 말아놨습니다. 그제야 일이 한결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메밀은 낱알이 잘 떨어지는 곡식이라 베어서 베개둥치만큼씩 하게 다발을 묶으면 거꾸로 세워 말려야 바람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바쁜 일이 거의 끝나면 그제야 져다가 마당에서 타작을 하지요. 제 어릴 적 기억으론 어떤 때는 미처 털지 못한 메밀 다발위에 눈도 수북하게 싸이던 것이 생각납니다. 또 왼쪽 어깨가 아파옵니다. 일 줄어드는 재미로 좀 무리를 했는지 어느 한쪽 힘줄이 좀 댕기는 듯하자 그때부터 다시 쳐들지도 못하게 아픕니다. 제 시의 어느 한 구절에 ‘왼쪽 어깨의 통증은 평생 낫질을 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 이라고 썼습니다. 낫을 든, 결코 부지런하지 못한 농부 한사람이 깊어진 가을 오후에 긴 그림자를 끌며 가만히 멈춰서 있습니다. 텅비어버린 밭을 보며 아마도 잠시 자기 연민에 빠진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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