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돌아가신지 삼 년째인 둘째 누님의 제사여서 전남 순천에 사는 조카 집에 다녀왔습니다. 가지 못할만한 일이 있었는데 누님 제사보다 큰일이랴 싶어 떨치고 집을 나섰습니다. 큰형수님과 둘째 형수님을 모시고 가는 형님의 차에 좁으나마 함께 갈수도 있었지만 저는 일부러 버스를 탔습니다.

살아생전 아버지 제사를 보러 오느라 누님이 타고 왔던 그 길을 저도 한번 되짚어 가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차는 거침없이 달려 네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예전에는 거의 하루씩 걸러 누님이 오시곤 했습니다.

날은 참 맑고 화창했습니다. 날이 맑고 화창했기에 바깥 풍경처럼 제 머리에 스치는 상념은 명징하면서도 한편은 무겁기도 한 것들이었습니다. 옛 추억을 현재로 불러오면 그 순간엔 고통스러웠던 것들도 시간의 마술이 작용해서 즐거운 것들이 되기 쉽지만 당사자가 부재한 그 절대성 앞에서는 즐거웠던 순간들도 고통이 되고 마는, 어쩌면 제 여행은 순례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누님은 저를 참 귀여워했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해에 시집을 가버린 큰누님과, 아옹다옹 싸움만 실컷 했던 제 바로 위엣 누님과는 달랐습니다.

제 기억에 지금도 뚜렷이 남아서 지울 수없는 게 있습니다. 아버지가 엄하셔서 누님들의 밤 마실과 화장품 쓰는 걸 금하셨는데 아버지 몰래 동동구루무 장수한테서 산 구루무를 누님이 바를 때마다 나에게도 발라주고 그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안고선 이마에 뽀뽀를 해주던 모습입니다. 그러던 누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울로 식모살이를 갔습니다. 누님에 대한 제 그리움이 시작된 것이지요.

절실해진 것들을 글로 드러낸다는 것에 익숙하지만 그 익숙함의 반대쪽에는 항상 거부감이 있습니다. 다치고 싶지 않은, 봉인돼야할 순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누님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 중심의 실체는 결코 건드리지 않는 모순이 제게 있습니다. 삼 년인가 사 년인가 식모살이를 하다 누님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있지 않아서 누님은 결혼을 했습니다. 매형은 전남 고흥 사람으로, 배를 타며 여러 어촌을 떠돌다가 저희 동네까지 흘러온 이였습니다.

사실 말이 결혼이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집안에서 오빠들의 반대를 무릅쓴 것이라 매형과 눈이 맞은 누님의 결혼은 밤도망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제 귀에도 몹시 불경스럽게 들립니다만,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난 후 식 올리지 못한 것에 무슨 원이 맺혔던지 시골 허름한 예식장을 빌려서 누님과 매형은 뒤늦은 결혼식을 하고 그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남겼습니다. 밤도망의 족쇄에서 스스로 벗어나려 했던 것이겠지요.

어쨌거나, 누님과 함께 여기저기를 떠돌던 매형이 애를 하나 낳아가지고 처갓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두 사람의 그 참담했을 심정을 지금에 와서 제가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이 이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그때 어린 제 마음에도 누님의 처지는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저희 집 아랫방에 깃들어 살면서 매형은 어업에 열심이었지만 이쪽바다에 경험이 없고 돈이 없는 사람이 겪어야 하는 것은 늘 실패와 사고였습니다.

평생 농사를 지은 내가 매형 일을 돕는다고 난생처음 바다에 나갔는데 배의 엔진 고장으로 하룻밤을 떠돌아야 했던 끔찍하게 불안했던 경험도 그때 했던 것입니다. 제가 시방 어촌에 살면서도 농사보다 수입이 좋은 어업에 손대지 않은 것은 그때 그 경험 때문이기도 합니다. 매형이 바다에 나가면 누님은 바닷가를 서성이다가 돌아와 늘 어두컴컴한 부엌에 앉아 있곤 했습니다. 어느 날 보니 부뚜막의 중발에 담긴 율무를 실에 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찬장 속에 밥그릇 세 개뿐인/ 살림살이를 꿰고 있다/ 친정살이 삼년을/ 꿰고 있다”고 시를 썼지요. 누님과 관련된 많은 시중에서 발표하지 않은 습작기의 첫 시였습니다.

그런 친정살림을 걷어치운 누님이 이번에는 매형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삼대독자인 매형이 돌아간 고향의 오두막집은 늙은 어머니 혼자만 달랑 사는, 역시 바닷가 마을인데 거기서 두 번째 딸을 낳고 어부들을 상대로 술, 밥과 잡화를 파는 장사를 해서 살림은 조금 안정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누님은 그때부터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누님보다도 매형이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배를 타고, 누님과 함께 그물을 건지러 갔다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것이었습니다. 그 상황을, 저는 뭐라고 복기할 수가 없습니다. 누님이 겪어야했을 그 망망대해에서의 고립과 절망을 대체 무슨 수로 표현을 한단 말입니까?
단지 몇 년 후 누님마저 몹쓸 병으로 죽어 다시 못 올 길을 떠나며 우리 앞에 한줌 재만 남겼을 때, 오도카니 남은 두 조카 앞에서 저는 이렇게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누님이 살던 남도의 이 바닷가 집을 언젠가는 순례하듯 맨발로 걸어서 오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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