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오늘은 이상하게도 참 한가하단 느낌이 듭니다. 할 일이 없어서도 아니고 날이 궂어서도 아닌데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왜 그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당분간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면도하고 머리감는 귀찮은 일 따위에 신경 쓸 것 없고, 간밤에 얼음이 얼고 몹시 추워서 일하기에는 좀 뭣한 날이긴 합니다. 그러면 이럴 때는 차분하게 들어 앉아 책상 앞에 두고 뭔가 정리를 해야 마땅하겠지요. 그런데 몸이 그렇게 움직여주질 않고 아침 먹은 방바닥 아랫목에 언제까지나 들러붙어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한가한 것인지요. 물론 당사자인 제가 어떻게 생각하나에 따른 것이긴 한데, 한가하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 한가함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게으름이라는 단어가 들어와 앉아 저를 조금 불편하게 합니다.

어떤 일에 마음을 내고 그에 따라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머릿속 생각으론 지금 당장 실행해야 하는 일도 몸을 일으키고 싶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건 마음과 몸, 둘 중 하나가 상황 판단을 잘못하는 것 때문이겠지요. 또 생각을 결정하는 주변의 여러 요소들이 수시로 바꾸어지는 것도 중요한 변수이고요. 그래서 저도 늘 마음과 몸이 일치하는 생각과 행동이라는 것이 내 안에서 어떻게 생겨나고 어디로 흘러가며 합해지고 또 갈라지는지를 들여다보고, 느끼고, 때로 객관화해 보려 노력합니다.

또 다른 자아가 내 몸 밖에서 저를 지켜보게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지켜본 저라는 사람은 아무래도 몸의 행동이 머리의 언어를 자주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제 몸이라는 녀석이 자꾸 닦달하고 채근하지 않으면 점점 편한 쪽으로만 가려고 하는 버릇이 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제 정신까지 자꾸만 꼬드깁니다. 그래서 게으름이란 병을 들게 하고는 그래도 안됐던지 한 가닥 각성이라는 것을 남겨 놓아 저를 불편하게 합니다.

돌이켜보면 제 몸에 새겨져서 생각을 지배하는 버릇이나 습관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이루어진 게 많습니다. 막내여서 응석받이로 자란 까닭이겠는데, 이기적이고 남을 잘 배려하지 못하는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굶어보거나 크게 고생해보지 않으며 컸기에 눈 부릅뜨고 무얼 가득 움켜 쥐어보고 싶은 욕심도 별로 없습니다. 감수성이 한참 예민하게 발달하던 열두어 살 무렵부터 사춘기까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록 수준에 맞지는 않았지만 책을 좀 가까이 했다는 것, 더 다행인 것은 농사일을 통해서 때를 알고 잔뼈가 굵었다는 것 정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보면 글줄이나 쓴다고 책상에 엎드린 시간이 많아질수록 끙끙 몸을 쓰는 일은 적어지고 더 게을러졌습니다. 책을 통해 얻는 파편적 지식의 모자이크도 생각건대 위험한 일이요, 그에 바탕을 둔 글쓰기도 마찬가지 아닐는지요. 더 노력하고 더 깎아내야 되는데 이제는 나이라는 게 그것을 방해하는지 몸을 극한 상황에 놓고 생각을 벼랑까지 몰아 서릿발처럼 반짝이게 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한가함에 대해 다시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드리기를 ‘한가함을 인식한 순간 한가함이 없어지고 게으름이란 단어가 불편하게 한다’고 했는데 제 성격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편안함이나 기쁨, 혹은 슬픔, 고통 따위의 감정을 순수 그자체로 느껴보길 원해서 저를 가끔 거기에 동댕이질 칩니다. 일로 말하면 어떤 것은 죽기 살기로 합니다. 쉬엄쉬엄, 슬슬 즐기면서 해야 한다고는 말하면서 실제로 좋아하는 일에는 밤이 아까울정도로 미치고요. 휴식해야 되는 시간이 주어지면 방안에 옷 다 벗고 누워서 그야말로 손가락하나 꼼짝 말고 쉬자고 주문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게으름이란 단어가 떠오르면 불편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생각했습니다. 노동은 정신의 휴식이요 휴식은 정신의 고통이다. 맞다!!

정말 가장 바람직한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육체와 정신이 섞바꿔서 일하고 쉬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일 겁니다. 그것은 어차피 끊임없는 자기 프로그램화이며 훈련으로 얻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작으나 크나 어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다는 것은 남과 다른 그 무엇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으니까요. 저처럼 어떤 강박증이나 불안이 때로 흔히 말하는 적당한 스트레스가 되어 일의 성과를 내기도 하지만 오래두고 보면 피로가 쌓인 꼴이 되어서 정신의 경화를 느끼곤 합니다.

오늘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겨울날이 이제는 춥고 눈 올 날이 더 많을 것이기에 미리 해놔야 할 것이 참 많은데 무얼 믿고 방바닥에 눌어붙어서 이 모습을 불안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다가 아예 열흘이고 스무날이고 날이 궂어 버리면 그때는 또 일 마치지 못한 것에 대한 께름칙함 때문에 마음이 차분해지질 않습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그래서 제가 살찌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방위 복무를 하던 시절을 빼곤 30년을 한결같이 63킬로그램쯤에 몸무게가 맞춰진, 빼빼마른 보기 싫은 몸뚱이는 하여간에 언제쯤 말랑말랑 유연하게 살이 붙은 정신을 가지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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