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과의 약속 실천하는 민생 대통령 될 것”


30대 이전, 국장(國葬) 두 번…피 묻은 저고리와 넥타이 빨면서 눈물
40대, 조용히 살면서 나를 돌아본 계기 그리고 아버지 명예회복 앞장
50대, ‘선거의 여왕’ ‘정치인’ 박근혜 각인, 대선후보 탈락 고배도 마셔
60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 새롭게 장식

‘정치인 박근혜’가 걸어온 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와 달랐다. 20대부터 대통령가(家)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달려온 출세가도가 아니었다. 좌절을 맛보기도 했고, 그래서 다시 도전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1979년 10·26 사태로 청와대를 떠났을 때부터 1997년 12월 정치입문 전까지의 18년 기간을 ‘외롭고 긴 항해’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시절이 은둔과 칩거로 치부될 때 난 쓴웃음만 나온다”며 “그때도 난 대한민국 하늘 아래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다.

■ 30살 이전에 맛본 인생의 단맛과 쓴맛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 셋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사이의 첫딸로 태어났다. 10살이 되던 해인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박정희전 대통령이 제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가족들의 청와대 생활이 시작됐다.

이후 성심여중, 성심여고를 거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1970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어머니는 역사학과에 가기를 희망했지만 ‘산업 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가 있었다고 했다.
1974년 어머니 육영수가 8·15 경축행사에서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을 거두면서 2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퍼스트 레이디가 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까지 5년 동안 국정 경험과 함께 국제적인 외교 감각을 터득했다.

이어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마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숨을 거두면서 27살이라는 나이에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경험했다.
한참이 지난 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어머니의 피묻은 저고리와 아버지의 피묻은 넥타이를 빨면서 남들이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18년동안 세상밖으로 물러나 자신을 위한 조용한 발걸음을 계속했다.

■ 18년간의 조용한 발걸음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한동안 아버지 어머니를 동시에 잃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이후 18년 동안의 ‘조용한 세월’을 보냈다. 세상은 은둔이라고 보지만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자서전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또 다른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5공 시절 영남대재단 이사,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았고, 5공이 끝난 뒤에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정수장학회 이사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남긴 육영재단에 애착이 많았다.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안에 근화원과 목련정, 영해루 등 한국 전통 양식집을 지어 놓고 유치원생과 청소년들에게 우리 전통과 생활 예절을 가르치도록 했다.

5공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 회복 운동을 시작했는데 1988년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를 발족했고 1989년엔 근화봉사단을 조직했다. 또 아버지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위해 ‘겨레의 지도자’라는 책과, ‘조국의 등불’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40대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조용히 사는 인생이 만족스러웠다고 했다. 하지만 자서전에서는 “당시 나는 정치와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늘 신문과 뉴스를 꼬박꼬박 챙겨 보며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과 걱정의 끈을 놓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던중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지원하는 것으로 정치활동에 첫 발을 내딛었다.

■ ‘선거의 여왕’ 박근혜의 탄생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지원하는 것으로 정치활동에 첫 발을 내디딘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1998년 4월 치러진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나라당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이후부터 공식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IMF 위기를 맞아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 때문에 정치인 박근혜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자서전에서는 당시 상황을 밝혔다.

이어 1998년 4월 이른바 달성대첩이라고 불리는 보궐 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총재의 1인 체제를 비판하며 당권·대권 분리와 국민참여경선을 요구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2월 28일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고, 이 기간 동안에는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 남북철도 연결 금강산댐 공동 안정성조사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남북한 축구경기 등 굵직굵직 한 현안들을 협의하기도 했다.
이후 이회창 전 총재가 개혁안을 상당부분 수용하면서 2002년 후반 한나라당에 재입당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불법 대선자금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의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았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사람들에게 ‘정치인 박근혜’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2004년이다. 당시 한나라당은 차떼기 사건에 휘말리며 당으로서 존재 의의조차 가질 수 없었고, 그해 치뤄진 4·15총선에서 실패는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이런 당을 맡아 열린우리당의 싹쓸이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때부터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당내 입지는 커졌고, 그 뒤 2006년 6월 대표를 물러날 때까지 그는 2년 3개월 동안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여당 대표 8명을 갈아치웠다.

특히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선 유세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했다. 의사는 “1㎝만 깊었어도 목숨이 위험했다”고 했다. 병상에서 선거 상황을 보고받자 한 말인 “대전은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이 한마디가 알려지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선거운동 마지막 날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상황에서 다시 유세에 나서며 호남·제주를 뺀 모든 시·도에서 단체장과 의회를 휩쓸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이를 토대로 2007년 처음으로 대권에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익히 알려진 대로 이명박 현 대통령에게 당내 경선에서 패해 본선 무대는 밟아보지도 못했다.

■ 절치부심 5년…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

당심(黨心)을 장악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2007년 대선 도전에 나섰으나 샐러리맨 신화와 청계천 건설을 바탕으로 경제 살리기를 내세운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민심’에서 뒤지기 시작했다. 결국 2007년 8월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고배를 마신 후 “저 박근혜,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2011년 12월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하고 당명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바꾸는 쇄신을 시작했다. 친이계 물갈이 공천 등을 통해 총선에서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면서 집권 여당의 대선 후보를 예약했다.
그리고 5년을 절치부심한 끝에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19일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으로 18대 대통령 자리에 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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