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아주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다가 그것이 무너졌을 때의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젊었을 때는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의 크기가 더 강하고 커보였어도 쉬이 사라졌지만 나이 먹으니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통증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것은 이렇다 하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가슴 저 밑바닥에 깊이 자리 잡고 앉아 위로 받아야 할 그 무엇도 없이 시시때때로 목울대를 밀고 올라와 사람을 아프게 때론 우울하게 합니다. 간절하게 바랐다는 것은 제 인생의 모든 것을 어느 한 패에 다 걸고 올인하는 도박 같은 그런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와 상식, 그리고 진실이 바로 세워져서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바로 이번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놓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순진한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이 나이 먹을 때까지 결과가 중요하다면 그 과정도 정당해야 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흐려놓은 진실은 진실이 아니며 그 바탕위에 세워지는 가치도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이번 선거를 보면 심판을 보거나 감시해야 할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어느 한편에 서고 여기서 더 나아가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나오는 것을 교묘하게 방해까지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당 후보가 외치는 국민통합이 가짜라고 생각했습니다. 잘못된 과거에 대한 정리나 진정한 사과 없이 함께 미래로 나가자고 하는데도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서민의 삶은 안중에도 없이 온갖 기득권을 다 누린 사람이 이제 와서 민생을 말하고 경제 민주화를 이야기할 때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야당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서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것도 좋았고 안철수 현상이라는 것 때문이었기는 하지만 정당정치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담대하고 꿋꿋하게 나아가는 모습에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우리 사회가 바뀔 아주 중요한 기회를 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저의 생각을 누구에게 주장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도 젊었을 때 이야기지 나이 먹으니 쑥스러워서 하지 못할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선거의 기간이 왜 그리 길고 답답한지 조바심이 생겨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바꿔져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온통 머리를 짓눌렀습니다. 안철수를 지지하는 사람들, 진보정당의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야말로 저 1987년의 대선처럼 모두들 ‘진보 대 보수, 민주 대 반민주의 건곤일척의 싸움’이라고들 하니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더 무거워지기만 했습니다. 자리에 누워서도 온갖 상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투표 날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차에 아내를 태우고 마을로 내려가 형수님과 5촌 작은 어머니 한분을 마저 태우고 투표장에 갔습니다. 그 전전날, 투표 끝내고 오면서 모처럼 짜장면이나 한 그릇씩 먹자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투표 끝내고 나와 중국집에 와서 짜장면을 먹으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야당 후보가 이기기만 한다면 지지하는 사람에 상관없이 짜장면 백 그릇이라도 사겠다! 그러면서 투표율이 얼마를 넘으면 무엇 무엇을 하겠다던 약속을 내 놓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됐습니다.

그날 저녁때를 어떻게 보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녁 여섯 시 출구조사발표가 나온 이후 여태껏 텔레비전을 켜지 않고 신문을 펼쳐들지 않았다는 것 밖에는 분명한 게 없습니다. 밥을 먹어도 무슨 맛인지 모르겠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을 뿐이었습니다. 내 스스로 양심적이라는 것을 자처하면서도 노동자들이 싸우는 현장에 한 번 가보지 않았는데 이제 그들은 어떻게 하나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또 강정마을은, 4대강은, 남북문제는, 여러 의문사들은, 전 정부의 각종비리는, 불법사찰 인권침해 검찰개혁은, 언론의 공공성은, 그들이 말하는 국격이라는 것의 추락은, 그리고 농민, 농업, 농촌 문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이 튀어 나오며 이제는 철옹성 같이 굳어져 가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가 절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아픈 역사도 역사지만 도대체 우리는 언제 한번 제대로 된 역사를 가져보나 싶었고, 신라가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 반도를 통일한 이래 왜 아직도 우리는 외세의 지배아래 있으며 그들이 비웃을 일만 하는 민족일까 부끄러워졌습니다.

저는 오늘 겨우 시장한 생각이 돌아와서 반 공기나 밥을 먹고 마침 송년회가 있어서 밖에 나갔습니다. 한 삼십 명 모인 자리라 당연 선거 이야기가 나옴직 한데 일언반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술도 많이 마시지 않고 노래방에 갔어도 고래고래 부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정신적 상처가 너무 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당 후보가 졌다면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도 이유야 어디에 있든 이렇게 상실감이 컸겠지요. 부디 그가 역지사지의 입장에 서서 이 사람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질 수 있는 정책을 펴 나가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를, 한낱 실 날에 이 절망만큼이나 무거운 희망을 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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