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며칠째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날리다 멎고 또 날리다 멎고 하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멎을 생각을 하지 않고 줄곧 퍼붓습니다. 눈발이 굵어서 날은 그리 춥지 않지만 요즈음 며칠은 참 매섭게 추웠습니다. 햇발이 비추는 낮에 잠깐씩만 추녀의 고드름이 녹아 흐를 뿐 밤이면 다시 더 딱딱하게 얼음이 얼었습니다. 하여 뒤란 처마 밑에 놓아둔 김칫독까지 얼었습니다. 근래에 없던 일입니다. 김치냉장고에 채우고 남은 김치를 저희는 항상 서너 동이씩 뒤란에 놔두고 먹는데 빨리 익어서 탈이던 것이 올해는 반대로 됐습니다. 밖에 둔 김치가 얼었다고는 해도 여기 온도는 기껏 영하 7~8도일 뿐입니다.

서울은 엊그제 온도가 영하 14도, 체감은 20도였다는군요. 저는 이날 이때껏 그런 날을 겪어볼 수 없는 곳에서 살지만 딸애들이 걱정이 됐습니다. 서둘러 일찍 출근해야 하는 애들이 아침이라도 따뜻하게 챙겨먹고 나서야 덜 추울 텐데 아직 젊은 것들이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서는 입맛 없다 바쁘다 핑계로 그냥 갑니다. 잔소리인줄을 알면서도 늘 전화에 대고 시켜도, 하기야 이런 것이 실은 제 위안일 뿐 애들의 귀에는 그저 경 읽는 소리이겠지요. 예년보다 20여일 빨리 한강이 얼었다는 그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성탄 즈음에 비록 징검다리이지만 애들이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휴일이 많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휴일이 많이 낀, 눈 내리는 성탄절! 있는 사람들에겐 추위쯤이야 무슨 큰일이겠습니까. 어른이든 아이든 그저 즐겁기만 하겠지요. 번쩍이는 네온사인과 성탄트리, 그리고 따뜻한 쇼핑, 거리에 넘치는 징글벨과 사람들, 이런 모습은 어쩌면 지나간 시절의 고전적인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 양극화가 되돌릴 수 없을 지경으로 진행된 지금은 여유 있는 사람들이 스키장이나 해외여행을 가고 나머지는 방콕행이라지요.

어쨌거나, 교회도 다니지 않는 제가 이번 성탄절에는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온다는 기별이 있어서도 아니요, 해마다 와서도 아닙니다. 아무래도 제 마음이 누군가, 무엇인가로부터 위안 받고 싶어서였는가봅니다. 이런 마음이 언제부터 시작됐느냐에 굳이 대답한다면 지난 19일후부터였습니다. 그것의 결과에서 시작된 정신적 트라우마에 얼토당토않게 산타를 기다리는 제가 생각해도 우습습니다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산타가 아니라 그 마음을 가진 저희 동네 교회의 성가대 아이들이었습니다. 눈이야 오든 오지 않든지 추위에 아랑곳없이 성탄절 새벽이 되면 산 밑 외딴 저희 집까지 어김없이 성가대 아이들이 와서는 캐럴송을 부르고 조그마한 선물을 놓고 갔는데 단잠을 깨워 불편하기만 하던 그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 지금에서야 새삼 생각나더군요. 이것은 교회를 다니고 안 다니고를 떠나서 예수라는 사람이 펼쳐 보여준 상처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향한 인류애, 그 보편적이며 특별한 사랑 때문이겠지요. 저는 그것이 그립고 기다려졌습니다.

성탄절 전야에도 밤새 눈이 내렸습니다. 아마도 눈이 내리고 날이 꽤 추워서 더욱 그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생각해보면 저희 동네 교회는 학생은 하나도 없이 80 넘기고 90 넘긴 할머니 서 너 분만 다니는 듯합니다. 그러니 밤새 기다려도 성가대 아이들이 올 턱이 없지요. 하지만 행여나 꿈속에서처럼 가만히 찾아와 예전처럼 초코파이 한상자로나마 위대한 사랑을 증명하기를 바라며 뒤척였던 그 비이성적인 행위에서 허망하게 깨어나 맞는 하얀 아침은, 그러나 허망하지 않은 그 무엇을 하나 깨우쳤습니다. 상처는 누군가에게 위로받아서 치료되지 않는다, 위로받고자 하는 그 마음을 다른 이에게 돌려서 오히려 위로해줘야 치료된다는, 대상화된 입장에서 주체가 된 입장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 말이지요. 이것은 어쩌면 반전과 역설입니다. 있는 자가 없는 사람을 위로 하는 게 아니라 없는 사람이 있는 자에게 ‘네가 가질 수 있는 그 부조리한 제도에 대해’ 오히려 위로해야 합니다. 눈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따뜻하고 눈을 맞을 수밖에 없는 사람은 그 눈이 춥지만 함께 눈을 맞지 못하는 이 현실을 아파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내안의 상처는 치료되고 사랑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조금은 어줍고 상투적이지요. 하지만 성탄절 날 아침 부엌에 먼저 나와 불을 지피면서 했던 이런 생각들이 제 마음을 따뜻하게 했습니다. 저희 집 부엌은 사람 서넛 들어서면 찰 정도로 작고 낮아서 솔가리 한줌에 불을 붙여 잔가지 두어 움큼이면 금세 따뜻해지는데 불을 붙이면서 퍼뜩 그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누군가 불을 피워서 따뜻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방안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겠지만 내가 먼저 불을 피움으로써 나도 따뜻해지고 남도 따뜻해지는 사실 앞에 ‘성탄절 선물이 이것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운 겨울을 나는 아이들에게 항상 하는 잔소리 아닌 이런 말을 해줄 수 있겠다 싶어서 조금 더 기뻤습니다. 아침 먹고 아내와 커피 한잔을 서로 나누며 몇 분들에게 전화라도 한 통씩 해서 안부를 물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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