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력의 원천 ‘머리카락’ 삼손을 사로잡은 여인

  
 
  
 
지금으로부터 약 3천여 년 전인 기원전 13세기~11세기. 300년 가까운 이어진 이 시기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사사(士師) 시대’라 일컫는다. 이시기는 한마디로 ‘왕이 없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데, 왕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지도자를 ‘사사’라 불렀다.

이 시기는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나온 후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 지역(지금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르러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원주민들과 ‘피가 피를 부르는’ 끊임없는 영토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였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데릴라’는 이스라엘과 분쟁하던 ‘블레셋’ 족속의 미녀로, 성경에는 삼손을 죽게 만든 요녀로 묘사되고 있으나, 그들 민족에게는 미인계를 이용하여 민족을 구해낸 영웅인지도 모른다. ‘블레셋’은 오늘날 ‘팔레스타인’ 이라는 지명을 만든 그 주인공들이다.

괴력의 삼손
사사 시대가 시작된 지 어언 150년, 이즈음 이스라엘은 이웃 부족 ‘블레셋’에게 40년 동안이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소라’ 땅에 사는 ‘마노아’라는 자는 아내가 잉태를 못하자 신에게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아들을 낳으면 평생 술을 입에 대지 못하게 하고 죽을 때까지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하게 하겠노라고 맹세한다. 머리를 안 자른 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중요한 약속이었다.

기도의 효험 탓인지 마노아는 아들을 보았고 이름을 삼손으로 정했다. 삼손은 성장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다.
블레셋의 수령들은 걱정이 깊었다.

“이스라엘 사사 ‘삼손’이라는 자의 괴력에 대해 들었소?”
“그자가 우리 ‘딤나’ 땅의 한 여인에게 잠깐 들러 오다가 포도원에서 그만 사자와 맞닥뜨렸는데 그걸 글쎄 맨 손으로 찢어 죽였다 하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어느 마을에 들어가서는 무고한 사람 삼십 명을 때려죽이고 노략해서 내기 빚을 갚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워낙 완력이 세니…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큰일 납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사사이기도 하니 함부로 처치할 수도 없고…….”

학살
블레셋 수령들은 삼손에 대한 정보를 계속 수집했다.
“아내를 친구에게 주었다가 후회하고 장인에게 찾아가 다시 아내를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제 성질에 못 이겨 여우 삼백 마리를 붙잡아 꼬리에 횃불을 달고 풀어 놔 우리 블레셋 사람들의 농장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걱정만 하고 있던 차에 좋은 소식이 들어왔다.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인들이 너 때문에 우리가 블레셋 사람들의 핍박을 받는다며 삼손을 결박해 우리에게 넘기겠다고 했답니다.”

과연 이스라엘 사람들은 삼손을 결박했다. 웬일인지 삼손은 순순히 응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삼손을 인계받으러 약속한 들판에 나갔다. 그들의 고민은 이제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들의 환호는 이내 비명으로 바뀌고 만다.

삼손은 결박을 썩은 짚더미 끊듯 풀어버리고는 들판에 떨어진 당나귀 턱뼈를 집어 들고 닥치는 대로 블레셋 사람들의 머리를 내려쳤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들판에는 맞아 죽는 이, 공포에 질려 도망가다가 깔려 죽는 이, 삼손을 도와 블레셋인 학살에 동참한 이스라엘 젊은이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이들의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이런 일을 당했어도 블레셋 인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이 지배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던 그들의 무력감… 그렇게 세월은 이십년이 흘렀다.

데릴라, 삼손을 묶다
그 동안도 삼손의 여탐은 끊이지 않았다. 기생집 나들이가 제 집 드나들 듯 했다.
그러던 삼손이 진짜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소렉 골짜기에 사는 ‘데릴라’ 라는 여인을 보고 나서부터다. 삼손은 이국 풍모의 이 아름다운 여인에 빠져 정신을 못 차렸다.
이를 안 블레셋의 수령들은 데릴라에게 지령을 내렸다.
“반드시 그를 결박해야 한다. 너는 우리 용사들이 가서 그를 묶어 올 수 있도록 그의 힘을 마비시켜야 한다.” 데릴라는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성서에는 데릴라가 삼손에게 “청컨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는지 내게 말하라”고 수 십 번에 걸쳐 물어보았다고 기록한다. 물론 삼손은 “왜 그런 것을 물어보는가?” 라고 물었을 것이고, 데릴라는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믿는지, 그런 믿음을 보여야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여길 수 있을 것 아니냐”고 답해 삼손을 헷갈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삼손은 그때마다 ‘푸른 칡 일곱가닥으로’ ‘한 번도 쓰지 않은 밧줄로’ ‘자기 머리카락 일곱 가닥에 직조 틀의 실과 섞어’ 자기를 묶으면 힘을 쓰지 못한다고 둘러댔다.
술에 취한 삼손을 그의 말대로 묶어 보았으나 그는 잠이 깨면 이내 거미줄 끊듯 풀어버리는 것이었다. 데릴라는 삼손에게 집요하게 따지고 들었다.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어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느뇨. 나를 희롱함이 심히 잔인하도다.”
삼손은 자기 힘이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머리카락에 있다”고 마침내 털어 놓았다.
그가 술에 취해 잠든 어느 날 데릴라는 삼손의 머리를 삭발해 버린다. 그 후 그를 묶어 놓으니 그는 과연 결박을 풀지 못했다. (이 머리카락 설화는 삼손의 심리적 공황 또는 삼손의 보안시스템이나 무장의 해제 등에 대한 비유적인 기록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블레셋 사람들은 드디어 숙원을 해소했다.
“이야~ 정말 데릴라가 큰일을 해 주었어” “정말 우리 민족의 영웅이야. ‘다곤’ 신의 축복이 함께 할 거야.”

공멸
잡혀간 삼손을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두 눈을 뽑혔다. 그는 놋줄로 매여 옥(獄)중의 거대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됐다. 그는 비참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이방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인생마저 나락에 빠져버린 자신을 수도 없이 원방했다. 그 사이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났다.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은 신전에 벌어지는 그들의 축제에 ‘구경거리’로 삼손을 끌어냈다.

신전에 블레셋의 유력인사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저 놈이 그렇게 우리 블레셋 사람들을 못 살게 굴던 삼손이란 자라네.” “저놈의 꼴 좀 보라지.” “죽을 때까지 실컷 부려 먹어야 해.”“이스라엘 놈들에게도 저놈의 몰골을 보여 다시는 우리에게 대들지 못하게 해야 해.”
온갖 저주와 조롱 속에 신전으로 끌려 나 온 삼손은 자기를 이끄는 소년에게 가운데 기둥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그는 신께 “마지막 힘을 달라”고 기도한 후, 양손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움찔하는가 싶더니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렸다.
“블레셋 놈들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삼손의 목소리는 우레처럼 신전 안을 울렸다. 그 큰 기둥이 붕괴되자 거대한 신전이 흔들렸고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신전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 날 죽은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이 생전에 죽인 블레셋 사람들 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삼손도 이때 함께 죽었다.

블레셋의 꽃
데릴라가 그 때 거기에 있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삼손을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삼손이 잡혀 가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녀의 심정이 어땠는지도 기록된 바 없다. 그러나 그녀가 삼손을 유혹한 것은 어쨌든 자기 민족 블레셋을 위한 일이었다.

블레셋 수령들의 회유와 강권이 있었을테고, 삼손의 저돌적 애정 공세에 공포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데릴라로 인해 삼손은 이성이 흐려졌고 몸도 상했다. 이는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을 힘겹게 다스리던 블레셋에게 큰 공이 되었던 것이다.

삼손이라는 영웅을 파멸케 한 데릴라의 이름은 팜므파탈의 전형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블레셋의 꽃은 이스라엘의 창을 능히 눌러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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