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날이 좀 따뜻해지는가 싶더니 지붕위에 한 뼘도 더 되게 얼어있던 얼음이 녹아 추녀를 타고 흘러내립니다. 밤이 되어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지 낙숫물 소리는 내내 그치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겨우내 문틈으로 스며들던 시린 바람도 들어오지 않아 새벽녘에 아랫목을 파고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방문이 희뿌윰해져서 버릇처럼 문을 열었더니 뜻밖에 가늘디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봄비인 셈인가, 속으로 가만히 날짜를 헤아려 봅니다. 오는 김에 많이 와서 눈도 좀 녹여 버리고 푸석푸석 부풀어 오른 땅들도 좀 가라 앉혔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제 바람만큼은 아니었지만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이틀이 와서 아쉬운 대로 두껍기만 하던 겨울의 모습을 얼마간 씻어갔습니다.

아침을 준비하느라 뒤란 장독대에 다녀온 아내가 무엇이 그랬는지 장독대 옆이 파헤쳐 있다고 말했습니다. 눈에 덮여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이 녹자 드러난 모양입니다. 불을 때다 말고 가서 살펴보니 짐작대로 멧돼지가 다녀간 흔적이었습니다. 냄새를 잘 맡는다고는 하지만 눈으로 덮인 땅속의 것을 어찌 알았던지 군데군데 도라지가 자라던 곳을 죄다 뒤집어 놓았습니다. 몇 년을 두고서 키우며 아까워서 캐먹지도 않은 것들인데 하룻밤 새 산적의 몫이 되어버렸습니다. 다른 곳은 어떨까 걱정이 되어 이번에는 집 앞에 심어둔 도라지와 더덕 밭에 뛰어가 보았습니다. 그곳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작년가을, 고구마 캐내고 그 자리에 갓 씨앗을 뿌려 두었는데 땅속에 남아있던 고구마 하나씩 찾아먹느라 그랬는지 그곳까지 빈틈없이 갈아엎어버렸습니다. 기다란 그 주둥이에 무슨 힘이 그리 있는지 언 땅을 파헤친 것 보면 놀랍기만 합니다. 화나고 속상한 것도 잠시 잊고 이놈을 잡아 길들이면 소 쟁기보다도 낫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나저나 도라지, 더덕 밭을 점점 늘려나가려던 계획이 일찌감치 어려워졌습니다. 온 밭에 목책기를 두르든지 멧돼지란 놈을 잡아 족치던지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게 생겼습니다. 하지만 둘 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밭의 삼분의 일쯤 되는 면적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목책기를 설치했기에 이제 또 하려면 순전히 제 힘으로만 해야 합니다. 그 비용이 아마도 백오십만원에서 이백만원은 들어야 되지 싶습니다. 당장 여기에 쓸 것이 없으니 멧돼지란 놈을 잡아서 족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그것은 왠지 싫습니다. 산이 품어 기르는 것들은 다 영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가 이런 믿음을 갖는 것은 제 어렸을 때 어른들이 하던 이야기를 저저이 들어서이기도 합니다. 산짐승 잡으면 재수 없다는 바로 그 이야긴데 실제로 제 눈으로도 보고 겪기도 했습니다.

배를 부리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바다에 나가지 않는 겨울철이면 올무를 놓아 노루나 고라니를 잡곤 했는데 그 잡는 마릿수에 맞춰서 꼭 이듬해 고기잡이철이 되면 크고 작은 배 사고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것 생각지도 않고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는데 너무 까닭 없는 사고가 잦으니 자연스레 믿어지게 되더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사냥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또 밤길에 차에 다치고 죽는 것들은? 졸래졸래 따지고 보면 근거 없는 믿음임이 드러나지만 자기 경험으로 다가오면 사정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어느 해 저는 밭둑 풀숲에서 갓 깨어 어미를 따라 나섰던 꿩 새끼 몇 마리를 줍게 되었습니다. 지게를 지고 가는데 발밑에서 꿩이 후드득 날아올라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래도 순간 노란 병아리 새끼들이 눈에 띠었는데,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보니 거짓말같이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새끼들이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을 뿐 어디 가지는 못하였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가만히 지게를 벗어서 세워두고 그 자리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 잠시 기다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이삼 분 안에 발밑 여기저기서 새끼들이 기어 나왔습니다. 손을 뻗어 이손저손으로 줍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것이 금세 예닐곱 마리 되었지요. 집으로 돌아와서 라면상자 안에 가두고서 마당 귀퉁이 나무그늘아래 두었습니다. 머잖아 삐약거리는 소리를 좇아 어미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나 지켜볼 심산이었는데 어미도 나타나지 않고 한 삼십분 지나자 새끼들이 하나둘 시들거리며 죽어갔습니다. 안되겠다 싶어서 처음 잡았던 자리에 가져다 놔주었지요. 순간 그 근처에 진즉 돌아와 있던 어미의 새끼를 찾는 끅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제가 갑자기 목이 메어왔습니다. 후회로 가슴을 치고야 말았지요.

모내기철이라 멀리 떨어진 논에 가서 트랙터로 로터리를 하는데 기계가 갑자기 덜커덕 멈추었습니다. 한 시간 가까이 수리하고 나서야 마칠 수 있었는데 저는 그때 한순간 전류처럼 제 머릿속을 훑고 가던 어미 꿩의 슬픔을 다시 한 번 느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 도라지 밭을 망쳐 놓은 녀석은 머잖아 다시 올 텐데 그때는 어찌할는지 고민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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