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춘첩을 붙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일 년 내내 쳐다봐도 좋은 글귀입니다. 해마다 똑같은 글이어도 새로 써 붙이고 바라보면 더 새록새록 느낌이 살아옵니다. 먹을 갈고 알맞은 크기로 종이를 자르고 잘 된 글씨를 얻기 위해 몇 번이고 써 보는 동안 그 글의 뜻이 마음속에 아로새겨졌기 때문일 겁니다.

저희 집은 대문이 없어서 춘첩을 마루 기둥에 붙입니다. 비가 세게 들이치는 여름을 겪는 동안 풀로 붙인 춘첩이 종종 떨어지는 일이 있어 풀로 붙인 그 위에 투명테이프를 또 한 겹 두릅니다. 그러고 나서 멀찍이 서서 바라보면 기둥에 대련을 걸어놓은 듯 하고 왠지 일 년 동안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춘첩을 쓰고 붙이는 것을 무던히도 보고 자랐습니다. 예전 살던 저희 집 윗방이 서당이어서 입춘 날이면 한나절 내내 춘첩을 쓰고 또 그것을 얻어가는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오십여 가구가 모여 사는 동네인데 게딱지같은 오막살이 집 몇을 빼곤 죄다 춘첩을 써 붙였으니까요. 내용도 지금처럼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슬하만세영. 이 글귀는 정말 눈물 나도록 좋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제 부모를 다 여윈 나이여서 그럴까요? 붕새동산 부릉부릉 이니 작조정전 재작재작 따위는 지금이나 예나 잘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결 같았던 듯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배어나옵니다. 부엉새와 까치의 우는 소리에서 재물이 쌓아지고 부흥하기를 바라는, 재치가 드러나 재미마저 느껴집니다.

작년에 써서 바람벽에 붙여두었던 춘첩 위엔 뉘 집이라 할 것도 없이 또 작년 동지 때 쑤어서 뿌린 붉은 동지팥죽이 더해져 붙어있습니다. 애기설이라고도 부르는, 음의 기운은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고 비로소 양의 기운이 솟기 시작하는 동지에 춘첩 위에 뿌려지는 신령한 벽사의 주술이니 이 얼마나 숭고한 행위인가요. 그래서 저희가 별 탈 없이 이만큼이나마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이지요.

저는 연필과 볼펜 세대여서 그런지 저희 집에 서당이 없어지고 수상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춘첩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제 새끼들한테 보여줄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제가 어릴 때 그래왔듯이 춘첩을 써 붙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집에 붓 한 자루 남아 있지 않아서 난감했습니다. 입춘 날에서야 말고 그걸 어디로 사러 갈 수도 없었지요. 생각다 못해 손가락 굵기 만한 칡 줄기를 끊어서 붓을 만들었습니다. 겉껍질과 속대를 잘근잘근 두들겨서 벗겨내고 가닥가닥 찢어서 묶으니 훌륭한 갈모필이 되었습니다. 붓글씨를 써 보지 않은 저에게 아주 안성맞춤으로 글씨마저 예술적으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몇 년을 칡으로 만든 붓을 썼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붓을 써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군요. 돌아가신 형님의 유품 중에 문방사우가 온전하게 있어서 저는 그것을 가져다가 그때부터는 붓으로 쓰고 아들 녀석에게도 쓰기를 권해서 그것을 제 것과 나란히 붙이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동안은 붓글씨에 빠져서 틈틈이 먹을 갈고 붓을 잡았습니다. 붓글씨는 정신을 한 데 모으고 안정되게 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아름답고 훌륭한 서체를 체계적으로 좀 배워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지만 백리 밖에 있는 학원에 다니는 것은 부담스러워서 그냥 혼자 저만의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시 한편을 베끼기도 하고 남이 쓴 것을 흉내도 내보았지요. 똑같은 글이라도 쓰는 도구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마음이 참 많이 달라지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올해는 춘첩을 제가 쓰지 않았습니다. 연초에 옛날부터 오랫동안 왕래하며 지냈던 형님 한 분이 춘첩을 써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붙였습니다. 언제든 한 번 와서 보시면 기분이 좋으시겠지요. 그러면 내년에 또 써 보내 주실까요?

하지만 저는 마음 한구석이 조금 허전한 기분이었습니다. 뭔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입춘이 지나가서 섭섭하기조차 했습니다. 작년만 해도 춘첩을 써 붙이고 스스로 대견해서 마치 큰일 하나 마친 듯 술도 한 잔 맛나게 먹었는데 올해는 그런 것이 없으니 섭섭하지요. 그러나 내년에는 저도 춘첩을 여러 장 써서 아는 분들에게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조그마한 제 정성 몇 글자로 한 달, 아니 하루라도 사람들 마음이 밝고 편안해질 수 있다면 봄의 처음을 시작하는 것으로는 나쁘지 않다 여겨집니다.

대개 설 지나고 대보름 사이에 입춘이 들어 있는데 올해는 설 이전에 입춘이 들었습니다. 입춘 날 눈발이 보였으니 음력으로 치면 서설이기 전에 춘설이 흩날린 셈입니다. 이렇다 할 구름도 없이 맑은 하늘인데 날이 워낙 추운 탓인지 은빛의 눈이 꽃잎처럼 반짝입니다.
무심히 지나치곤했던 집 앞의 매화가 그새 봉오리 부푸는 것이 추워도 봄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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