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아침 먹고 커피 한 잔! 마음이 참 평화로워지는 시간입니다. 차는 혼자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지만 커피는 둘이 먹는 게 좋습니다. 그것도 아내랑 단 둘이가 더 좋습니다. 집에서 커피만은 거의 제가 탑니다. 커피 한 잔이라도 남이 타서 주면 더 맛이 있다지요. 커피 타는 일이 하찮은 일인 듯해도 그렇기 때문에 은근히 귀찮은 일입니다. 그래서 그 귀찮은 일을 남이 해주는 게 커피 맛을 더 하는가 봅니다.

오늘도 아침 먹고 설거지 끝낸 아내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동안 제가 커피를 타다 공손히 바칩니다. 미안한 기색 한 터럭 없이 아내는 커피를 받아먹지만 저는 사실 이런 자차분한 일에 기분이 좋습니다. 커피 잔 앞에 놓고 신문이든 잡지든 눈앞에 읽을거리를 펴 드는 것이 포기할 수 없는 저의 소소한 일상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런 소소한 일상들은 신문을 펴고 텔레비전을 켜는 순간 사라지고 맙니다. 설 지난 직후 북한의 3차 핵실험이 신문을 온통 도배하다시피 하고 그에 맛서는 남한의 군사훈련 모습을 보여주는 동영상들은 가슴을 조이게 합니다. 저러다가 서로 잘못된 판단이나 실수로 단 한발이라도 상대편으로 날아가게 되면 전쟁은 불 보듯 빤할 것입니다. 왜 다시 이지경이 됐는지 그 원인을 따지고 책임을 묻기에 앞서 시골구석에 앉아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커피 한 잔의 일상이 사실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괴롭습니다. 어느 나라의 역사를 봐도 전쟁이라는 것은 일반 국민의 결정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지요.

아침 햇발은 오늘도 변함없이 동해를 건너고 산을 넘어와서 창호 문을 눈부시게 비춥니다. 그 환하고 따뜻한 기운이 방안에 가득차서 상념에 잠긴 저를 바깥으로 끌어냅니다. 간밤에도 날씨가 얼마나 추웠는지 낮에 녹았던 물이 다시 꽝꽝 얼어붙고 나뭇가지마다 상고대가 핀 듯 서리꽃이 온통 하얗습니다. 하지만 계절의 변화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어서 햇살이 비추자마자 겨울의 기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온화한 기운만이 가득합니다. 간간히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도 하지만 햇살이 내려앉은 토방 마루는 참 따뜻합니다. 전쟁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리에 퍼지는 이 햇살의 아름다운 눈부심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일찍 피어났을지도 모를 야생화 한 송이라도 찾고 싶어서 개울을 따라 집 뒤 산길을 걸었습니다. 언제 어디에 무슨 꽃이 피는지 가보지 않아도 눈에 잡힐 듯 보이지만 오늘은 왠지 저 혼자만 가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을 꼭 찾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은 바람꽃이랍니다. 학명으로도 이곳 지명이 붙었는데 피는 것이 여기만은 아닌 듯, 조금 있으면 야생화를 찍는 사람들이 꽃 소식을 묻혀 나를 겁니다. 꽃소식은 듣기만 해도 마음이 설레는 것이지만 그러나 어디에 무슨 꽃이 피었네 하고 소문이 나면 그곳을 향하는 발길들이 이내 소란스러워 집니다. 고즈넉함과 쓸쓸함도 사라지고 태고의 신비 같은 것도 사라지고 금세 남의 눈을 피해 파헤쳐지고 짓이겨져서 저잣거리가 됩니다. 온전한 것을 온전하게 두고 보지 않는 것이 바로 전쟁이리라 생각됩니다.

심중에, 꽃만을 찾아 나선 것은 아니었든가 제 눈은 때로 먼 곳을 향하기도 합니다. 파란 하늘, 멈춰있는 듯 흐르는 하얀 구름, 그리고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도 숲속에선 날카롭지 않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가 발밑을 다시 찬찬히 살펴봅니다. 작년 큰물과 바람에 길이 바뀌고 쓰러진 나무들로 막혀서 그 작고 여린 꽃들이 제 있던 자리에서 다시 피어날까 걱정이 됩니다. 낙엽 속을 들춰보기도 합니다. 큰 바위 아래 흙바탕에 발을 멈춰보기도 하지만 때가 이른지 꽃을 보려는 제 마음에 티끌이 있는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어느 한곳에 무릎 꿇고서 꽃대가 올라오기를 간절히 바라면 꽃을 볼 수 있을까요? 꽃이 피어나듯 전쟁대신 평화가 피어나길 바라는 사람이 적어서 우리나라는 시방 이 불구덩이 지옥으로 가려고 하는 건지 가슴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한동안 열심히 꽃을 찾다가 양지쪽 낙엽위에 앉아 잠시 햇볕을 쪼입니다. 살며시 누워 눈을 감았습니다. 햇볕에 달궈진 땅의 기운이 제 몸을 뚫고 하늘로 오르는 듯 눈꺼풀 안에서 뿌연 안개 같은 것이 가물가물합니다. 냇물 소리가 들리듯 낙엽 아래서 무슨 수런거림도 들리는 듯합니다. 얼굴에 비치는 햇빛이 따가워 옆으로 누우니 설핏 잠이 들었나 봅니다. 꿈속에서 저는 일어나 꽃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양지쪽 낙엽 위에 누워서 마치 나 자신이 물을 빨아올려 꽃잎을 피우려는 듯 이상한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꿈속에서도 ‘이것은 꿈이다’라는 자각 때문에 그것이 엷어지며 깨어난다는 점입니다.
 훈련인지 초계비행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비행기 편대가 굉음으로 산을 흔들며 또 한 차례 하늘을 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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