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삼월이 됐는데도 아직 일을 손에 잡지 못했습니다. 겨우내 놀기만 했던 버릇이 몸에 밴 탓이지요. 하지만 놀기만 한 것도 전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난겨울은 유난스러워서 밖에서 일을 할 만큼 따뜻한 날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12월 초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과 추위는 1월이 가고 2월도 중순이 지나서야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는데, 2월은 또 알다시피 설과 보름이 들어있어 저같이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은 핑계 삼기 좋았습니다.

특히나 이곳 풍물 단체의 상쇠를 맡고 있는 저는 농한기인 겨울 석 달은 일주일을 집에 온전히 붙어있기 힘이 듭니다. 아무리 마음을 도사려 먹고 밖에 나가지 않으려 해도 어디서 굿 칠 일이 생기면 나가봐야 되는데 굿이란 게 또 술 한 잔씩 먹고 얼큰한 신명으로 쳐야 되는 것이라 어렵사리 끊어냈던 술도 자꾸 도로아미타불이 되기만 했습니다. 하여 겨울은 항상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자주 갈등이 생기는 그런 계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지내 놓고 보면 처음의 맑은 각오로 차있던 내가 나중 게으르고 탁한 나에게 케이오 패 당해 있곤 합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영국의 어떤 극작가처럼 묘비명에 ‘어영부영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쓰게 되지나 않을지 씁쓸한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대보름 지나고 나니 마음이 견딜 수 없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늘밭 풀은 보름 쇠기 전에 한 댓새에 걸쳐 아내와 함께 뽑아냈습니다만 웃거름을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남들은 다 하는데 저만 가만있으니 하루하루가 답답하지요. 바로 이어서 감자도 심어야 하고요. 또 바로 이어서 더덕과 도라지 밭도 조금 더 늘려야 합니다. 삼월 중순 전에는 울안과 밭둑 주변에 나무도 여러 그루 심어야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달 안에 작년 태풍 때문에 뽑아두었던 비닐하우스를 다시 설치해야 합니다. 방문 앞만 나서면 눈에 띄고 발에 밟히는 게 일인데 조금만 날씨 추워도 몸이 움츠러들어 마음을 내기가 어렵기만 합니다. ‘그래 오늘은 해볼까? 어떤 일을 먼저 하지?’ 괜스레 안절부절 방안을 들락거리며 책상에 앉아서 책을 펼쳐봤다가 밖에 나가서 울안을 서성거립니다. 어리석게도 이러느라 한나절씩 아무것도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는 것이 매사에 성마른 저의 모습입니다.

다시 방문 열고 뒤란에 나가 서성입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화단엔 베어내야 할, 검불이 된 꽃 대궁들이 어지럽습니다. 지난 초겨울만 해도 비록 꽃은 졌어도 성성한 그 모습들이 좋아서 놔둔 것들입니다. 그것 자체가 봄여름가을, 온 계절을 증거 하는 것이라 그 위에 고스란히 겨울의 눈을 맞는 그 스산한 풍경까지를 저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지금은, 그것은 계절의 껍데기일 뿐입니다. 그것을 걷어내지 않아도 뿌리로부터 새싹은 돋아나겠지만 언제나 새로운 시작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이미 담장 밑 햇볕 따뜻한 곳에는 샛노란 복수초가 고개를 내밀고 피어서 게으른 저를 빤히 쳐다보고 웃고 있네요. 꽃은 그 자체가 이미 그 식물에게는 절정! 하여 저도 화들짝! 마음의 겨울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오늘은 봄의 작업복을 갈아입었답니다.

바람이 잔잔하기에 우선 마늘밭에 거름을 뿌립니다. 유기인증 품목고시가 된, 농협에서 사온 포대거름을 한 줄에 네 포대씩, 마늘밭 두둑이 다섯이니 모두 스무 포대쯤 뿌리면 됩니다. 마늘밭 머리마다 먼저 네 포대씩 거름을 옮겨놓고 삼태기에 쏟아 부어 옆에 끼고는 고랑을 따라 발을 옮기며 한손으로 조금씩 재빠르게 쓸어냅니다. 이것은 제가 개발한(!), 더 없이 고르고 빠르게 뿌리는 방법입니다. 외발 손수레에 쏟아 부어 고랑으로 밀고 다니며 삽으로 흩뿌리는 유기농 친구들에게 전수해준 방법이기도 합니다. 한 두둑 네 포를 뿌리는 데는 채 십 분이 넘지 않을 듯합니다. 한 두둑 두 두둑 세 두둑까지 뿌리고 나니 등에 후줄근하게 땀이 베여옵니다. 물론 오른팔도 아파오지요. 조금 쉴까 하다가 그 쉬는 시간이면 이미 다 끝낼 수 있을 듯해서 마저 뿌렸습니다. 이제 웃거름 걱정은 끝입니다. 시작하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왜 그렇게 걱정스러워했는지, 이번에는 슬며시 멋쩍은 웃음이 나옵니다.

빈 포대를 정리해서 묶어두고 밭둑에 서있는 은행나무를 베어버릴 준비를 했습니다. 일하다가 그늘에 기대어 쉴 생각으로 심은 것인데 집이 가까워서 그럴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은행도 열지 않은 수나무인 것이 오히려 밭에 그늘을 빨리 만들고 그 주변의 거름만 빨아들여 땅이 메말랐습니다. 한 가지 좋았다면 가을에 샛노란 잎을 달고 밭둑가에 선 모습이었습니다. 심은 지 벌써 25년이나 된 나무인데 아름은 채 못 되어도 가슴둘레는 30센티미터가 넘을 듯합니다. 막 쓰러 눕히기 버거울 것 같아서 먼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무성한 가지들을 베어 몸피를 가볍게 하는 것입니다. 톱을 대기 전에 잠시 나무에 손을 모읍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곳에 비닐하우스를 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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