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형님의 큰 아들이 결혼해 딸 셋을 낳았는데 오늘이 셋째 딸 돌이라고 식구들끼리 저녁밥이나 함께 먹자고 건너오라고 하는군요. 낳았다고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돌이라니, 세월 참 빠르다는 생각에 새삼 놀라 가슴속에서 무엇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랫동네 사시는 큰 형님네 식구들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일 것을 생각하니 이내 마음이 즐거워지며 저녁이 기다려졌습니다. 하여 오후엔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고는 안방 불도 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 때 두었습니다. 저녁밥 먹으러 오라는데 불 땐다고 늦게 갈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아마 지금쯤 형님 집에서는 음식 장만 하느라 부산하겠지요.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아기 돌이라는데 명색 작은 할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떻게 빈손 쥐고 가냐는 거지요. 첫째와 둘째 애 때는 그래도 옷이라도 한 벌씩 사 가지고 가서 겨우 체면치레를 했는데 이렇게 바짝 당해서는 어찌해야 되는 건지 난감했습니다. 옷 한 가지를 사려해도 읍까지 다녀와야 하는데 그것은 시간적으로도 불가능하고요. 가까운 농협마트에라도 가면 적당한 선물을 고를 수 있을지, 저는 생각다 못해 아내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봉투로 하면 된다고 망설임 없이 준비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잠시 허탈해서 멀뚱해졌습니다. 이게 과연 돈으로 하면 되는 일인가요?
우리는 없는 살림이라 돌 반지는 못해준다지만 한 식구끼리 어떻게 야박하고 메마르게 봉투하나 달랑 내밀다니요. 남이라면 으레 그런 것이 보통일이 된 게 오래지만, 그래서 돌이든 결혼식이든 회갑이든 봉투 내미는 게 결국 밥값내고 오는 것이라는 씁쓸한 자조와 함께 통과의례의 의미마저 금전주의와 편의주의 논리에 우리 스스로 묶인 지 오래지만, 정말이지 이 경우엔 봉투는 아니다 싶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와 아내의 생각이 충돌한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 차이도 잠시, 서로 이야기를 깊게 하지 않아도 제 아내의 준비된 답이라는 것이 결국 지금 이 상황에서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저 또한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좀 더 바람직한 방법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사실 제 아내는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인데 불쑥 나오는 대답에 제가 그만 사려 깊지 못하게 언쟁을 하려 했습니다.
식구들이 다 모였습니다. 큰 형수님과 그 아들 며느리 셋에 손자 셋, 둘째 형님 내외분과 그 아들 며느리 넷에 손자 넷, 그리고 저희 두 내외, 서울에서 볼일 때문에 온 조카와 손자 셋까지 세보니 모두 스물 두 명이었습니다. 어른들은 놔두고 아이들이 다 고만고만하니 그야말로 넓은 집안이 아이들 노는 굿이었습니다. 장가가서 애 많이 낳아야 된다는 말을 늘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양반이 둘째 형님인지라 손자들한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니 사람은 그 바라는 대로 되는가 싶었습니다. 막둥이인 저는 딸 셋에 아들 하나로 형제 중에 자식이 가장 많지만 아직 하나도 여의지 못해서 손자가 없습니다. 제 큰애가 이제 서른 살이니 저도 언젠가 진짜 할아버지가 되기는 하겠지요.

대가족이 모인 모습이 지금은 참 흔치 않긴 한데 그런 전통적인 모습 속에서도 속은 참 옛날과 많이 달랐습니다. 우선, 밥상머리에 다 같이 둘러앉았어도 대화다운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삼대가 함께 모이니 흔히 말하는 그 세대차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그중에서 특히나 여자들은 음식 신경 쓰랴 젖먹이 갓난쟁이들 돌보랴 혼이 빠져 있고 조카들, 그러니까 저희들끼리 사촌들은 서로 하는 일이 달라 말이 잘 이루어지지 않더군요. 우리 내외와 형님 형수님 사이에서만 고전적이랄 수 있는 이야기가 오가는데 그것 또한 오늘 이야기의 중심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대화나 생각으로 얽혀 있기 보다는 가족이라는 끈으로 묶여서 굴러가고 있다는 느낌, 달리 말하면 가족이기에 서로 다른 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이 자리가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 중에는 또 한 가지 놀랍게도 핸드폰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나누던 이야기는 중간에서 끊어지기 예사인데 통화가 끝나면 하던 이야기는 맥이 빠져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도시에 살면서 바쁜 일 때문에 오지 않은 식구들은 화상통화라는 것으로 이쪽저쪽의 모습들을 서로 주고받고 했는데 그걸 보면서 저는 세상 참 좋다는 생각 대신에 아까 봉투문제 때 느꼈던 느낌을 다시 받았습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리에 바로바로 이루어져야 속이 편한 세상, 그런 다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지. 시간이 더 많아지고 여유로워져서 삶의 만족감이 생기는지, 아니면 더 많은 일을 처리하느라 고달프기만 한지 얼른 짐작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의 기대되고 설레던 마음은 여러 가지 차이와 먹고 사는 방법들의 다름 때문에 저에게는 씁쓸한 뒷맛만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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