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로 얼룩진 성균관, ‘권력ㆍ야합의 과거시험’

준량의 복직은 또 한번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역사상 최연소 박사였다. 일약 29세 정7품의 성균관 박사 관직은 낮지만 그리 녹록지 않은 영예의 관직이다. 많은 직책 중 성균관 박사는 누구나 탐내는 대학자의 길로 나서는 요직이었다.

성균관 유생들의 눈동자가 살아 움직였다. 유생들 신고식도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유생 입학은 계절 별로 정해진 것이 없다. 대개 소과나 진사시험에 합격하면 성균관 입학이 허용되었다. 삼년에 한 번 있는 대과 준비를 위해 잠시의 틈도 없었다. 여유 있는 집안은 휴직하고 명산을 유람하지만 시골에서 올라 온 유생들은 쉴 틈 없이 공부에 열중해야 했다. 도성 유생들은 이름 있는 교수, 선비를 찾아 수학하고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맺어 성균관 출석을 등한시 하였다. 하지만 준량이 출석부를 점검하고 법칙을 준수하자 자연 성균관에 몰리기 시작했다. 매일 식사시간에는 유생들로 북적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궐에서도 수시로 주상께서 연을 베풀고 유생들을 독려했다. 그것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이보게 준량. 이것 좀 잘 검토해 보게.”

어느 날 동지사가 내민 봉투를 읽어 내려가던 준량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것은 청탁이었다. 정5품 이상이면 음서로 성균관에 자녀를 입학시킬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또 조상이 공신으로 등록되면 자격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번일은 아니었다. 지난번 자격 박탈한 유생을 추천한 것이었다. 어린 주상이 등극하자 처음으로 알성시를 치르기로 했다. 궐에서 주관하지만 시험자격이 주어진다. 지난 번 출석미달로 탈락한 유생을 추천 하라는 것은 일종의 부정이요, 권력의 횡포였다. 준량은 단호히 거절했다.

며칠 후 지사가 다시 준량을 불렀다. “너무 고집부리지 말게. 주상 외숙의 친족인데 우리가 거절한다고 해서 그게 언제까지 가겠는가. 설령 자네가 거절한다 해도 몇 몇이 추천하면 어쩔 수 없는 걸세.”
곧기로 유명하고 또 얼마 전 준량을 두둔해서 위기를 모면하게 해 준 성균관의 수장이 아닌가. 준량은 고심했다. 평생을 학자로 살아온 분이 새파란 청년한테 편지까지 써서 요청 하는데 결국 준량은 학칙을 하나 만들어서 건의했다.

새벽부터 자정까지 출석을 요구했다. 그것은 실로 매서운 벌칙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지난 번 출석 미달자들이 새벽부터 몰려들었다. 성균관의 새벽이 장날처럼 붐볐다. 공부의 열기가 저녁을 넘어 늦은 자정까지 이어졌다. 이번 알성시에는 응시자가 몰렸다.

한편 준량의 생각은 달랐다. 어차피 판은 짜여져 있었다. 과거시험의 합격자는 33인의 기준이었다. 갑과 을과 병과로 해서 급제 7인을 뽑아 서열을 정하고 주상이 1인을 지정해 장원으로 하는데는 별 무리가 없다. 단지 유생들의 자질이 문제였다. 불량한 선비는 공직에 나가 지방수령 직책을 수행할 때 얼마나 백성을 위해, 더 나아가 나라를 위해 올바른 인물이 되느냐가 중요했다. 성균관에 흐트러진 기강이 몸에 배이면 결국 정사에 반영되는 것이었다. 먼 길을 오고가면서 그러한 폐단을 보고 자라서 언젠가는 수령의 자질을 좀 더 애민 사상으로 무장한 훌륭한 학문의 장으로 만들고 싶었다.

유교근본은 인(人) 곧 사람이다. 거기에 준량은 공평한 즉 평등사상을 붙이고 싶었다. 누구나 평등한 자격을 얻어 교육, 생산, 관직의 잣대를 정하고 싶었다. 조광조는 정치개혁을 실천하려 했지만 너무 조급한 나머지 중도에 무산되는 역풍을 맞고 말았다.
준량은 작지만 교육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양인은 물론이요, 평민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었다. 적당한 선에 처신만 잘하면 판서쯤 올라가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준량은 옳고 그름의 판단력은 누구보다 정확하다고 여겼는데 성균관에 직책을 얻고부터 판단의 기준이 흐려져 갔다. 관직이 높아갈수록 작은 결정도 기준을 정하기 어려웠다. 나름대로 정도를 세우면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어느 덧 준량은 스스로 교육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성균관 학생이면 이미 배울 만큼 배운 자들이었다. 유교 이념도 근본도 줄줄이 외우고 있었고 중국 고전도 막힘이 없었다. 단지 과거라는 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르는 것이 목표였다. 물론 계중에는 학문의 깊이를 연구하면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실망하고 낙향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준량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단지 과거에 몰두하면서 애민 사상이 결여된 학생들이 문제였다. 긴 시간 공부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모르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이 관직에 들어서면 판단의 기준을 세우기 어려워 보였다.
혈기왕성한 준량은 박사 중에 가장 젊었다. 성균관 박사 직위는 단 세 명뿐이었다. 그들은 교육에만 힘쓸 뿐 옳고 그름에는 뒷전이었다.

인종이 죽고 명종이 들어서면서 거침없이 정치혼란이 가중되어 성균관에도 그 풍파가 찾아들어왔다. 음서로 삼십여 명의 추천학생들이 들어왔다. 권력에 밀려 입학을 허락했다.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아 이십여 명의 추천서가 또 들어왔다. 준량은 대놓고 반대했다. 선배 교수들은 물론이고 같은 박사들도 동조했다. 조정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새로 등극한 어린 주상이 강력해진 외척의 힘을 막을 수 없었다. 아니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조정 관리로부터 타협점을 들고 찾아 왔다. 이번 음서 추천만 들어주면 성균관의 여러 가지 특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뜻밖에 준량이 나섰다. 철저하게 반대하리라 생각한 준량이 앞장서서 타협점에 협상했다. 주변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자신의 입신을 위해 성균관을 이용했다는 비난이었다. 준량은 이번만은 성균관의 조직을 뜯어고치고 싶었다. 우선 준량이 의견을 취합하여 요구한 사항을 적어 보냈다.  입학 연령을 제한할 것, 입학 후 정한 년을 넘기면 자퇴할 것, 부모 삼년상은 연수에서 제할 것, 음서의 자녀가 정원의 1할을 넘지 않을 것 등이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들쑥날쑥 하던 학생이 정리되고 깨끗한 선비 양상이 가능할 것 같았다. 많은 성균관 관리들과 그렇게 합의했다. 커다란 타협이었다.

정5품 이상 관리의 자제들이 성균관 입학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 뻔했지만 명종 임금의 외척 세력도 나름대로 이점이 있었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준량이 앞장서서 권력과 야합하여 출세의 길로 들어서리라는 추측이었다. 그것은 두고 두고 준량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성균관 근무는 일반 관리들의 선망과 명예의 장이였다. 교수로서 학생, 스승, 제자라는 고리로 연결되어 권력에 층을 만들고 부정부패의 산파 역할을 끊고 싶었다. 선생들의 자질을 높이고 우유부단한 학생들을 쫓아버리고 지방에서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서원 출신의 우수한 학생들을 좀 더 많이 받아들이는 길이 열린 것이었다. 도성의 관리들이 준량을 주목했다.

우선 명년부터 성균관 입학이 음서로 십여 명이 전부였다. 은근히 비난이 쏟아졌다. 그것은 일종의 모함이었다. 성균관 규칙이 조정에 정식 승인이 되었다. 준량을 바라보는 시선이 비판과 혁신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권력과 야합이었고 또 한쪽은 교육 혁신이었다.
글=조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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