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책상을 하나 새로 만들었습니다. 글 쓴다고 나댄지가 20여 년이지만 반듯한 책상 하나 갖지 못했습니다. 늘 엎드려 쓰거나 밥상 펴 놓고 쓰기 일쑤였습니다. 밥상위에 널린 공책 연필들 치우기 싫으면 그대로 펼쳐두고 끼니 밥은 방바닥에 신문지 펴 놓고 먹어버릇했습니다. 밥 먹는 곳이 방이다가 마루이다가 때로 부엌 아궁이 불 앞에서 이기도 하듯이 제 글 쓰는 때와 곳도 항상 바뀌었습니다. 밥상 위에서 공책 펴 놓고 쓰는 것은 그래도 조금 그럴듯한 모습이고 와이셔츠 같은 물건 포장한 데서 나온 깨끗하고 빳빳한 종이 모아 놨다가 아무데서나 끄적였습니다.

배가 고프면 어디서 무엇을 먹어도 맛이 있듯이 가슴속에 넘치는 열정이 있어서 쓰지 않고서 견딜 수 없을 때는 때와 장소, 도구 따위는 전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 천둥 번개가 치고 마음속에 소낙비가 내리면 그 순간의 생생함과 날것 그대로를 행여 놓칠 새라 밭에서 일하다가도 종이 연필을 찾아 집으로 달려오고, 잠을 자다가도 수십 번씩 벌떡 벌떡 일어나 쓰고 버리기를 반복하며 고통과 환희를 맛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열정이 조금씩 식어가기 시작하니 글쓰기는 강박과 노동이 되었습니다. 하여 밤에는 전혀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온전히 잠만 자게 되고, 무언가 쓸 일이 생기면 벌건 대낮에 쓰게 되었습니다. 이게 나이 먹어서 새로 생긴 버릇입니다. 일하다가도 쓰고 자다가도 쓰는 것은 열정이 시킨 것이라면 낮에 온갖 사물을 관조하며 쓰는 것은 차가운 머리에 가깝습니다.

그 머리가 어느 날 갑자기 책상으로 쓰던 밥상을 밥상으로만 보이게 했습니다. 어찌 보면 쓸데없는 분별심이 생긴 것입니다. 저는 옷 갈아입는 것만 빼고 여러 가지가 깔끔한 사람인데 또 한 가지, 유독 제 책상만은 어질더분합니다. 그러긴 해도 그 속엔 제 나름대로 엄연한 질서가 있지만 밥상은 너무 좁았습니다. 좁다고 생각하자 책상을 크게 하나 만들어야겠단 생각이 든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보관해 오던 좋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붉은 색깔과 나이테 무늬가 아름다운 참죽나무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소목공예를 한다고 두껍게 켜서 잘 말려뒀던 것인데 그분이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병으로 돌아가시자 유족이 소목에 관심이 있는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나무는 고인의 뜻을 이어야하는 특별한 나무인 셈입니다. 그것을 비닐하우스 한 편에 20년도 더 넘게 보관해 오다가 아무래도 저는 나무의 본디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아서 지난겨울 서각을 하는 친구에게 사연을 이야기하고 넘겨주었습니다. 서각에는 참죽나무가 가장 좋은 재료라니 제대로 임자를 찾아준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고인과의 인연 한 끗을 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어 책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널판 세 쪽을 남겨놓은 것입니다.

책상을 만들자니 저에겐 갖춰진 연장이 없어 이곳 공동체 학교의 목공 선생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열흘쯤 되자 책상이 다 만들어졌다며 트럭에 실어왔습니다. 부탁한대로 앉은뱅이 책상인데 참죽나무가 두껍고 무거워서 발에는 바퀴를 달았습니다. 가로세로가 130cm에80cm이니 밥상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집으로 치면 오두막과 대궐의 차이 같습니다. 책상에 있음직한 여러 가지를 늘어놓아도 정말 공간이 넉넉히 남아서 물주전자며 간식거리 화장지 따위, 방안살림까지 놓여도 글 쓸 자리가 남습니다. 읽다만 책을 두 세권 펴 놓아도 되고 특히 쓰다가 마무리하지 못한 글 쪽들 펴 놓을 수 있으니 잊어버리고 묻혀버리는 일 없겠습니다. 열정도 중요 하지만 어떤 모양새도 글을 쓸 수 있는 간접동기가 된다는 사실에 많은 위안을 받습니다. 머리맡에, 언제든 일어나 쓸 수 있는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새삼스레 내 머리와 가슴속이 아니라 연필이나 볼펜 지우개 속에 수없이 많은 글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낯설면서도 경이롭습니다.

따라서 글쓰기는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가 합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열정이 먼저고 이성이 나중이겠지만 열정 없는 이성은 감동을 주지 못하고 이성 없는 열정은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낮과 밤이 번갈아 있는 이치와 같다 할까요. 책상을 새로 만들고는 마음이 새로워져서 기분이 참 즐겁습니다. 글이 쓰이지 않아도 느긋하게 기다리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냥 책상에 앉아서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벌건 대낮인데 밤처럼 마음이 편안합니다. 강박과 노동이라는 생각도 요모조모 따져보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치우친 생각이었습니다.

잠시 연필을 놓고 밖에 나오니 햇빛이 눈부십니다. 요즈음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해서 밤으론 얼음이 얼고 낮으로는 20도에 육박합니다. 날이 이러니 어제와 오늘 아침은 서리가 눈처럼 하얗게 덮였습니다.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자 그 서리가 녹아서 잠시 비가 오는 듯 추녀 끝에서 낙수가 떨어집니다. 집 뒤 산길을 걷다가 돌아와 다시 책상에 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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