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하루 종일 방에 한 번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종종거리고 돌아다녔어도 저녁때가 되니 무슨 일을 해 놨는지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이것저것 조금 조금씩 한 일이라 그러겠지요. 아침을 먹고 나서 오늘은 나무부터 몇 그루 심는 것으로 일을 시작 했습니다. 전날 비가 와서 어차피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읍에 있는 묘목 시장에 구경 겸 가서 사온 나무들입니다. 식목일을 2주가량 남겨 놓았어도 나무심기는 자꾸 늦어가서 마음이 급합니다. 묘목은 미리 뽑아서 묘포장에 임시로 심어 놓은 것이라 아직 싹이 나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나무들은 벌써 거의 다 물이 올라서 꽃피고 잎이 피기 시작하는군요. 살구 자두 매실을 한그루씩 더 심고 대추와 체리 나무는 새로 심었습니다.

나무 심을 때마다 늘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어린 묘목은 좀체 넒은 간격으로 심어지지 않습니다. 앞으로 크게 될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묘목 어린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좁은 땅에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심어놓고 몇 년 지나서 돌아보면 어느새 커서 옆 나무와 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새로 심지 않는다 해도 여기서 파서 저리 옮기고, 저기서 파서 이리로 옮기며 키와 간격을 맞추고 꽃 필 시기를 맞춥니다. 그래서 화단은 봄이 되면 계획 없는 사람 따라서 소란스럽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사람과 달리 화단의 그런 소란은 봄다워 좋습니다. 봄이란 게 원래 질서가 없는 것이라 애초부터 분별력으로 똘똘 뭉친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저 스스로 아내와 함께 화단의 파헤쳐진 흙 속에 한나절 뒹굴며 저희의 지혜 없음을 조롱해도 좋습니다.

마늘 밭에는 벌써 고자리가 생겨 잎과 대궁을 갉아 먹습니다. 작년에 달래를 한 두둑 심어서 싹이 잘났는데 좋아라 들여다보니 아, 글쎄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새까만 고자리들이 몇 마리씩 들러붙어서 어린 줄기들을 쓰러뜨리고 있지 뭡니까. 마늘밭에 달려가 보았더니 역시나 거기도 그놈들이 일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올해엔 초전에 박살(!)을 낼 생각으로 약통을 둘러맸습니다. 두어 시간 나무를 심고 나서 해가 어디쯤 올라왔어도 아직 이슬이 남아 있습니다만 열통은 뿌려야 될 것 같아서 그냥 시작했습니다.

한통, 두통, 세 통째 뿌리고 나니 부실한 왼쪽 어깨에서 싫다고 신호를 보냅니다. 몸이 성하려면 여기서 그만두어야 되고 마늘이 성하려면 계속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한 대다수 농민들은 몸 아픈 것은 끙끙 견디지만 곡식 아픈 것은 견디지 못합니다. 그것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과는 달리 생명이 있는 것들이기 때문일 겁니다. 참고 참으며 겨우 일곱 통으로 마무리 했습니다. 미생물 약이라 멱 감기듯 흠뻑 뿌려서 땅까지 적셔야 되는데 이렇게 뿌려서 저 그악스러운 놈들이 놀라기나 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은 어린것들이고 수가 많지 않으니 며칠 후에 한 번 더 뿌리고 지켜볼 생각입니다.

비닐하우스 칠 곳에서 베어낸 나무며 집 주변에 널려진 땔감들도 모을 건 한데 모으고 토막으로 자를 건 잘라서 좀 개운하게 정리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처마 밑에 가지런히 쌓아놓기만 하고 때지는 않아서 밑에서부터 한껏 썩어나도 산의 불땀 좋은 나무를 보면 자꾸 해다 놓고 싶어서 모아들인 나무들입니다. 요즈음은 날이 점점 따뜻해지는 바람에 안방에도 나무를 때는 양이 삼분의 이 정도로 줄었고 물 덥히는 정지 방은 하루 한차례 아침으로만 땝니다. 그러니 나무가 울안에 자꾸만 쌓일 수밖에요. 오늘을 끝으로 이제 나무를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렇게 이것저것 하다 보니 날씨가 따뜻하기도 했거니와 몸에서 열이 나서 점심때는 방에 들어앉기가 싫었습니다. 끈 조여 맨 작업화도 벗지 않고 손도 씻지 않고 그냥 마루에 올라  앉아서 방문 열어놓고 점심밥을 먹었습니다. 마루에서 밥을 먹을 때는 항상 방문을 열어둬야 된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귀에 저저이 들었는데 어른들 말씀으론 ‘사람이 죽어야 방문 닫고 밖에서 밥 먹는다’고 했습니다.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밥, 그것의 단절, 즉 문을 닫는다는 것은 생명의 유지수단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므로 방문 열어놓고 밥을 먹는다는 것은 죽음이 없다는 이야기, 더욱이 화창한 봄날의 점심이지 않습니까?

밥숟갈 놓기가 무섭게 일어나 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을 합니다. 화단을 지나치다 얼핏 가지자르기를 해야 할 나무를 보면 전지가위를 가져다 한 손 뒷짐 지고 서서 요모조모 뜯어보며 부실한 가지들을 자릅니다. 무언가를 보살펴 준다는 것, 이런 일은 참 즐겁습니다. 외발수레 새로 하나 조립하다 만 것도 볼트 너트 찾아서 마저 끝냈습니다. 전에 산 것은 따져보니 꼭 13년을 썼습니다. 이번 것으로는 또 얼마나 많은 일을 하게 될지. 몸은 예전만 못해도 제 마음만은 이렇게 단단하게 새로 조립되는 손수레 같습니다. 하루 종일 하고 다닌 일이 별 표시는 나지 않아도 봄이라는 발전소가 저를 참 많이 충전해준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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