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마늘밭 검정고자리가 정말 끝까지 속을 썩일 모양인가 봅니다. 꽃샘추위가 닥쳐오면 비닐 구멍 속 땅으로 들어가고 반짝 따뜻한 날이 시작되는가 싶으면 위로 기어 나와서 마늘대궁과 이파리들을 갉아먹기 시작하는데 그러는 동안에 마릿수가 늘고 몸집이 커져서 온 밭이 이제 고자리 천지입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무렵에 등에 지는 약통으로 거듭 두 차례나 비티계열의 미생물약을 뿌려주어서 시나브로 없어지려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약에 내성이 생긴 것인지 약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약 선택을 잘못한 것인지, 공부하고 연구하며 짓는 게 아니라 언제나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농사라 알 수는 없지만 튼실하던 마늘들이 하나하나 고자리 앞에 쓰러져가는 것을 보니 약을 만든 사람들과 그 회사에게 애꿎은 화살이 먼저 날아갑니다. “염병, 약값은 비싸게 받아 퍼먹으면서” 하고 말입니다.

보다 못해 날이 따뜻해지는 기미만 보이면 저희도 마늘밭으로 달려가서 고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파리에 붙은 놈들은 마치 누에가 뽕을 먹듯이 아삭아삭 갉아먹는 게 눈에 보일 정도이고 줄기에 붙은 놈들은 속대가 더 연하고 맛이 있다는 듯 한자리에 몇 마리씩 들러붙어서 파먹습니다. 하지만 작년 가을에 다 큰 딱정벌레 같은 놈들이 돌 밑에나 흙덩이에 노랗게 알을 슬어놓은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는데 몇 십만 마리인지도 모를 것들이 겨울을 지냈으니 이제 깨어나는 것을 무슨 수로 다 잡아내겠습니까. 생각다 못해 비닐봉지에 고자리 십여 마리 표본으로 잡아넣어가지고 친환경 농약을 파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약의 원액을 고자리에 묻혀보더군요. 세상에! 원액 먹고 비실대지 않을 물건 있든가요? 마늘밭 걱정이 한편의 코미디 앞에 그만 웃음으로 터지고 말았습니다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는 비싼 돈 주고 반신반의하며 그 약을 사들고 돌아왔습니다.

며칠 춥던 날이 또 반짝 여름날이 찾아온 듯 따뜻해져서 저는 아침부터 약통을 둘러맸습니다. 아침 뉴스의 일기예보는 이쪽 지방의 곳에 따라서 약간의 빗방울이 떨어진다고 했는데 지역기상대의 응답전화번호를 눌러보니 그 확률이 20퍼센트라고 했습니다. 이정도면 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무려 열통 가까이 약을 뿌려댔습니다. 약의 희석 농도는 설명서에 나온 것보다 약 1.5배정도 더 탔고요. 그래도 전체 다섯 두둑 중 세 두둑밖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새 마늘도 많이 자라서 약이 더 많이 들어가는데 당최 팔뚝이 아파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것 좀 보십시오. 나머지는 내일 하자 생각하고 약통 벗어놓고 점심 먹고 났는데 금세 바람 끝이 달라지더니 하늘 한쪽이 새까만 먹구름으로 덮여오지 뭡니까. 비싼 약, 힘든 펌프질, 비가 오면 다 헛일될게 뻔하니 제 마음도 시시각각 먹구름이 덮여갔습니다. 하지만 비도 오긴 와야 합니다. 왜냐면 더덕 종자 뿌린 밭이 지난번 비는 한 번 맞았어도 그새 거죽이 바싹 말라서 싹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덕은 종자가 깊이 묻히는 게 아니어서 흙 거죽이 축축하게 젖어 있어야 싹이 잘 나는데 비가 한 번 더 살짝 와주면 참 좋겠지요. 비올 확률 20퍼센트가 갑자기 변해서 100퍼센트가 되어가니 이것 어디에 울고 웃어야 할까요.

그래서 제 안식구에게 ‘대체 왜 나는 이렇게 걱정이 많은 거야 응?’ 하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사람 하는 말 좀 보십시오. “뭐하려고 그렇게 걱정을 허는가? 아 비가 오면 더덕 밭에 좋고 안 오면 마늘밭에 좋을 것을.” 저는 허허 웃고 말았습니다. 옛날 짚신 장수와 나막신 장수 아들을 둔 부모의 어리석은 걱정이 저에게도 똑 들어맞는 다는 것을 깨우쳐준 명쾌한 대꾸니까요. 그렇게 하루해가 가서 마늘밭은 우선 안심을 했더랬는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원망스럽게도 더덕 밭은 도움이 되지 않고 마늘밭 농약만 씻겨나갈 정도의 꼭 그만큼만 밤새 비가 왔습니다. 이래도 제 안식구는 걱정을 하지 않을 겁니다. 딴은 그 낙천적인 성격 덕으로 살림이 유지되고 제가 살아가는 것이긴 하지만서도요.

간밤에 온 얄궂은 비 덕분인지 오늘은 온 산에 안개가 가득 끼고 날씨는 푸근합니다. 산을 바라보니 불과 하룻밤 사이에 중턱까지 나뭇잎이 푸릇푸릇합니다. 봄엔 나뭇잎 피우려고 안개가 낀다더니 바람 불고 해가 나면 금방 흐트러져버릴 안개도 다 뜻이 있나 봅니다. 딱히 할일도 마땅찮고 어중간하여 어슬렁거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좀 이르긴 해도 양지바르고 물기 축축한 낙엽 속에선 참취가 애기 손바닥만큼씩 피어나 한 장씩은 뜯을 만합니다. 더덕이나 고사리는 눈에 띄지 않고요. 하지만 다래 덩굴에서 돋아나는 어린잎은 꼭 지금이 뜯기 알맞은 때입니다. 저는 한곳에 퍼질러 앉아 가져간 비닐봉지에 이것들을 뜯어 담았습니다. 이 순간이 좋습니다. 마늘 밭 걱정도 더덕 밭 걱정도 다 잊고 순결한 어린순을 뜯는, 이 순간만큼은 자연과 내가 하나 된 느낌이어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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