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도 없고 끼니 걱정에 남산 밑 관창에는 목재가 쌓이기 시작했다. 막강한 권력의 윤대감 집도 헐리어 반납하자 몰래 몰래 가져간 관리들이 앞 다투어 반납하고 있었다.

문정왕후가 명종을 닦달하고 나섰다.
“어미를 생각해서라도 외숙 집은 나둬야 하는 것이 아니요. 더군다나 짓던 집도 허물어 간단 말이요.”
사헌부 대사헌이 명했다.
“준량을 조사해 보시오.”
감찰이 공조를 이 잡듯 조사했다. 준량의 주변은 물론이요, 멀리 풍기 관아의 본가도 조사했다.
“그래, 도성은 없다지만 본가는 뭔가 있을 것이 아니요. 좌랑을 몇 년째 했는데…….”
사간의 말에 관리가 말했다.
“본가는 더 없었습니다.”
“그래요... 잘됐소.”
대사헌은 잠시 뜸을 들이다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입을 다셨다.
며칠 후부터 준량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성균관의 부정 입학 및 자격 미달자 과거응시에 대한 문제 때문이었다.

비록 준량 본인은 아니었지만 근무하면서 결재를 했다는 것이었다.
준량은 그것이 항상 문제일 수 있다고 여겼다. 권력의 외압으로 어쩔 수 없었지만 그때 관리들이 현재 준량을 따르고 있고 관리들의 자녀가 있기 때문에 때로는 힘이 되고 때로는 권력과 야합하여 출세한다는 비난도 있지만 엄연히 동지사를 비롯한 공명한 판단으로의 최선책이었다.
그때 이후 성균관 학칙과 과거제도 등이 많이 개선되어 좋은 이미지로 개선되었다고 자부했다.
또한 본인의 삶 역시 부끄러움이 없다고 자신했다. 털면 먼지가 나지 않는다는 옛 말이 새삼스러울 정도였다.

한편 부정한 일부 관리들이 껄끄러운 것을 감수하면서 준량을 비난하는 것은 그만큼 좌랑의 권한과 명종의 신임이 불쾌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대비의 명까지 거부하면서 좌랑으로 임명해 부정의 고리를 단절하려는 명종이 언젠가는 자신들의 뿌리도 끊을 것이 염려되기도 했다.

그래서 감찰어사로 제주 목은 가지 않고 나주 목으로 불러 감찰했다는 지적까지 내비치었다.
준량은 괴로웠다. 보통 좌랑, 정랑으로 평생을 잘 살아갈 수 있고 가문의 영광으로 다른 직책보다 먼저 기록하여 후세에 알리는데 자신은 3판의 좌랑을 지내고 어사를 두 번이나 수행하면서 최선을 다했는데 가진 것이라고는 부모가 물려 준 풍기 본가 밖에는 없었다.
당장 나가면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처지가 씁쓸했다.
준량이 사직서를 올리자 승지가 말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하시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준량이 말했다.
“신령으로 가고 싶습니다.”

승지는 그 동안 임금의 눈과 입으로 준량을 주목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길 원하자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뭐라고요, 그 먼 곳으로 간다고요?”
“그러지 말고 가까운 성균관에 있는 것이 어떻겠소!”
승지의 말에 준량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
저는 멀리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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