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

사나흘정도, 별로 할 일이 없는 듯해서 마당 앞에 있는 연못 고쳐 만드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연못은 자연스레 생긴 것이 아니라 꽃 기르기를 좋아하는 제 아내가 수련을 심기위해 만든 연못입니다. 여자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처음 만들 땐 저의 힘을 빌리느라 집사람의 입이 얼마큼은 닳아졌을 것입니다. 저도 역시 졸리느라 귀가 좀 닳아졌으니까요. 연못 파 달라고 부탁을 했을 땐 대수롭잖게 여기고 코대답을 했었는데 그게 거의 반년 가까이 끌면서 애걸하고 복걸하고, 기다리다 지친 안식구가 나중엔 직접 호미 들고 연못을 판다고 마당을 호비고 있기에 그 제사 안 되겠다 싶어 제가 괭이 들고 덤벼서 함께 만들었던 것입니다.

딴엔 잘 만든다고 만들었는데도 연못은 처음부터 조금씩 샜습니다. 바닥과 둘레에 비닐을 몇 겹씩 깔고 두른 다음 흙과 시멘트를 이겨 돌을 쌓았는데 이게 굳어서 물을 넣자 그만 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을 퍼내고 바싹 말린 다음 물이 샘직한 틈은 죄다 실리콘으로 막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없이 또 새서 그냥저냥 새는 만큼씩 물을 넣어주며 한 사오년 견뎌왔습니다. 그렇긴 해도 이 연못에 수련이 무성하게 자라 꽃을 피우는 것을 보고, 개구리가 알을 낳아 올챙이가 되고 다시 개구리가 되는 것을 보고, 물방개 소금쟁이가 놀고, 여름밤엔 청개구리 우는 소리를 즐겨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비록 한 평도 못되는 조그만 연못이지만 물가에서 잘 자라는 여러 종류의 석창포가 돌 틈을 메우게 했고 옆엔 배롱나무를 심어서 물가에 그 분홍색 꽃의 자태를 비추게 했습니다. 지는 꽃잎이 못물에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것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지 않은가요? 말쟁이의 꾸밈말이 아니라 실제 그랬습니다.
그런데 안식구가 갑자기 무슨 맘을 먹었는지 이 연못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이 담겨져 있진 않았어도 이제 겨울을 지냈으니 물을 넣으면 수련의 새잎이 돋는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내는 물을 넣는 대신 연못의 수련을 죄다 파서 대야에 담아 놓고선 맨 위의 돌부터 들어내는 것입니다. 지난겨울부터 간간히 연못을 고치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는 있었는데 그때도 역시 저는 설마해서 대수롭잖게 여기고 흥흥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전격적이고 과감하게 일을 저지를 줄을 몰랐습니다. 연못을 처음 만들고 사오년이 지나는 동안 에스트로겐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테스토스테론이란 남성 호르몬이라도 발호하였다는 것인지 호미 들고 땅을 호비는 정도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보고 진짜 남자의 기를 세운답시고 큰소리를 좀했지요. “아무대책도 없이 그렇게 일을 저질러 버리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여 시방? 뭔 준비를 해놓고 시작해야지 언제까지 보기 싫게 파 헤쳐만 놓고 보려고?” 이 말에는 좀 찔끔 해져서 안식구의 무모한(!) 행동은 멈췄습니다. 그러나 당장은 그렇다 해도 일이 이렇게 저질러진 이상 저는 참 난감했습니다. 제 성격대로라면 언제까지 이 상태여도 괜찮아서 속내로는 아내를 좀 설득해서 연못 고치는 일을 그만 포기하게 하려던 참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저질러졌으니 이제 어찌합니까. 제 손이 가지 않으면 되지 않을 이일 말입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끌다가 대야에 옮겨놓은 수련이 잎 내미는 것을 보고 안 되겠다 싶어 연못 고치는 일을 손댄 것입니다. 그러나 연장 챙겨서 일 시작하면서부터 속이 뒤집어져서 부글부글 끓는 것이었습니다. 참 공력 들여서 자알 싸놓은 멀쩡한 것을 물 조금 샌다고 다시 다 들어내야 한다니, 이 무슨 쓰잘데기 없는 헛짓거리냐고요. 제 팔이라도 좀 성하다면 견디겠는데 이날따라 돌 한 덩이 들어낼 때마다 유난스레 팔뚝이 아파서 몸이 다 움찔움찔 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에게 화풀이를 좀 해댔지요. 나중에는 못 듣겠는지 저 한쪽 화단 구석에서 속을 삭이는 모양으로 언제까지 등을 돌리고 앉아있었습니다. 그래 놓고 저 역시 속이 좋지 않아서 많이 후회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헛일이든 좋은 일이든 연못을 다시 고쳐 만들려던 집사람의 계획은 성공한 것입니다. 남편의 싫은 소리를 듣긴 했지만서도요. 그러나 제 계산은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입니다. 어차피 힘들여 일 해주면서 화내고 후회하니 이게 손해 아니면 무엇일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 가정을 이루고 살림을 살아도 남편과 아내의 일을 대하는 태도엔 넘기 힘든 벽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의 우선순위나 경중을 따지는데서 드러나는 차이인데 이번 연못 고치는 일이 참 좋은 예인 듯합니다. 제 안식구에겐 이일이 어쩌면 가장 우선 되는 일이었던 것 같아도 저에게는 제일의 가장 끄트머리에 놓여서 시간이 나야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여자가 훨씬 더 불리해서 남자의 일은 거의 다 함께 해주면서도 정작 자기일은 남자에게 도움받기가 힘이 듭니다.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