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린 재판 ‘백보재판’, 백성들 ‘모두 보상’ 받아


고을 백성들이 깃발을 세우는 관리들을 응시했다. 무슨 재판인지 어떻게 판결을 내릴 지 서로들 모르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고 있던 준량이 나와 재판을 시작했다. “팔공산 공지마을 최 판서댁과 같은 마을 김가는 앞으로 나오시오.”

공지마을 판서댁은 마름이 나온다고 하자 준량이 재차 물었다.
“판서댁을 대신하는 자인가”
마름이 나와 허리를 굽힌다. 김가네는 노인이 나왔다. 판서댁 마름과 김가네 상노인이 동헌 뜰에 무릎을 꿇었다.

재판에 대해서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하자 형방이 백성들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보리 싹을 심어서 이른 봄에 새싹이 나올 때를 첫 보로 치겠소. 지금 보리가 누렇게 익으니 90보로 치고, 다 익어 수확할 때를 백보로 치겠소.”
이방이 먹지에 한문과 한글을 써서 걸어 놓고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해 큰 소리로 읽었다.
준량은 재판을 시작했다.

“김가네 상노인을 90보에 세워라.”
판서댁 마름은 김가네 보리가 지금 몇보 되겠는지 묻자 망설이며 대답을 못하자 형방이 재차 다그쳤다.
“사또의 명이 안 들리냐?”
이방이 백성들에게 물어보자 여기저기서 판단 기준이 제각기 다른 말들이 흘러나왔다.
준량이 준엄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판서댁 마름은 40보에 세워라.”
건장한 마름이 40보에 서자 형방이 큰 목소리로 재판방법을 설명했다.

“보리가 익어서 거두어들이면 백보다. 지금 보리가 익고 있기 때문에 김가네 노인이 90보에 가 있는다. 보리 싹은 우마가 먹어치워서 다시 싹이 나와 자라고 있지만 곡식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수일이라도 망칠 수 있다. 징을 치면 힘껏 달려서 백보 깃발을 붙잡는 사람이 이긴다.”
형방의 말에 다들 어리둥절 했다. 과거 재판과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동헌 뜰에는 고소한 사람들이 죄인처럼 벌벌 떨면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총과 핍박으로 곤욕을 치뤘다. 재판에서 이겼다고 몇 자 적은 문서를 갖고 오지만 정작 읽고 따지고 할 능력이 없었다.

드디어 관리가 크게 징을 쳤다. 90보 노인은 달렸지만 노인이라 워낙 느렸다. 판서댁 마름은 진 것이 뻔하므로 어기적 걸었다. 여기저기서 야유와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이 100보에 이르자 또 한번 징을 쳤다. 마름은 겨우 몇 보를 어기적 걸었을 뿐이었다. 준량은 서류를 응시하고 있었다. 김가네 밭은 열 섬의 곡식이 나오는 상답이었다. 매년 곡식을 한 섬씩 세금으로 꼬박꼬박 냈으나 그 동안 십 여명의 식솔들은 얼마나 굶주렸겠는가. 준량이 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노려보다 형방을 불렀다. 잠시 후 형방이 큰소리로 외쳤다.

“최 판서댁은 공지마을 김가네에 다섯 섬 반을 물어줘라. 오늘 해 지기 전에 이행하라.”
다음 재판이 신속하게 이어졌다.
“양지마을 이 진사와 이웃 학 마을 정가는 앞으로 나와라.”

뜰에 운집한 사람들은 일순 조용해졌다. 이 진사 댁의 젊은 머슴이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형방이 확인하자 틀림없는 진사댁 하인이었다. 정가는 웬일인지 나오는 자가 없었다. 형리들이 찾아 데리고 나온 사람은 허리가 꾸부정한 여인이었다. 남편인 정가는 병든 몸이라 나올 수 없었고 대신 자신이 나왔다고 아뢰는 여인은 울고 있었다. 병든 삶에 찌든 여인네가 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 때 어린 여식이 나오며 말했다.
“어머니를 대신해서 제가 뛰면 안 되겠습니까?”

당돌한 어린 여식의 물음에 장내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준량이 혀를 차며 승낙하자 여기저기서 또 한번의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어린 여식이 90보에 서고 이 진사댁 머슴이 50보에 섰다. 징 소리와 함께 와 하는 함성이 들리고 어린 여식이 재빠르게 뛰었지만 뒤 쫓는 머슴이 순식간에 따라 잡자 끝까지 뛰던 어린 여식이 엎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징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정가네 여식이 이긴 것이었다. 이 진사댁 머슴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자 준량이 정가네 여인을 불렀다.
“작년에 이 고을에서 유일하게 고소장을 썼는데 곡식을 돌려 받았소?” 여인이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왜 말이 없는가?”
여인이 울면서 하소연한 내용은 이랬다. 작년에 곡식을 전부 뜯기어 고소를 했지만 돌아온 것은 매 뿐 아니라 일년 내내 머슴들이 와서 못살게 구는 바람에 남편이 얻어 맞고 병이 났다. 원통하고 분한 마음에 또 고소를 했지만 어린 딸까지 나서자 더욱 겁이 나고 무섭다고 했다. 준량은 그녀의 사정을 형리를 통해 듣고 있었다. 준량은 작년 재판 문서에 두 섬의 곡물을 물어줘야 하는데 받지 못한 것이 뻔해 보였다. 형리들이 다시 아뢴다.

“지난 해에도 두 섬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준량이 판결을 내렸다.
“잘 듣거라. 이번에는 반 섬의 곡식과 지난 해 두 섬의 이자가 한 섬, 총 세 섬 반을 해 지기 전에 갖다 놓아라. 그리고 관리들은 듣거라. 지금 당장 이 진사 댁에 가서 곡식을 갖다가 해 지기 전까지 저 여인의 집에 갖다 주고 돌아와라.”

추상같은 법의 집행이었다. 붉은 옷을 입은 형리들이 백성들을 헤집고 사라졌다. 여기저기서 함성과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세 번째 재판이 이어졌다. 결과는 뻔했다. 어찌 열보 가면 되는 사람이 당할 수 있는가.
재판에 관한 소문은 순식간에 고을에 퍼졌다. 고소를 한 사람들은 시원한 판결에 신이 났고 한 편으로는 보복이 두려웠지만 고을 원이 너무 훌륭하다고 여기며 여기저기 소문이 퍼졌다. 재판에 고소당한 사람들이 고발한 사람들을 찾아 협상을 해 스스로 얼마의 곡식을 보상해 주고 있었다.

재판을 해 보았자 질 것이 뻔하고 또 한편으로는 온 고을의 창피를 자청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들 또한 그것이 좋았다. 생전 처음 고발한 것도 마음이 무겁고 죄송한 마음이었다. 수대에 걸쳐 때로는 밥이라도 한 끼 얻어 먹은 적이 있고 조금이라도 도움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고소당한 사람은 다음 재판에는 열흘 후면 99보쯤 세우고 뛰면 한 발만 걸어도 이기는 재판인데 지금 합의 보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준량의 강력한 법 집행과 명쾌한 재판이 당사자 스스로 해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지고 있었다. 내심 준량이 바라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고을 여기저기서 백보재판은 하늘이 내린 재판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아무렇게나 곡식을 뜯어 먹던 마소가 사라졌다. 앞으로 재판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동쪽과 남쪽 지역인 영천도 고소를 거두고 있었다. 준량은 취하된 고소장을 불질러 버렸다.
글=조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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