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준량의 ‘백학’서원 설립 ‘학문의 중심, 인재 등용문’

여름이 지나자 하곡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들이 먼저 세곡미를 등짐으로 지고 와서 납부했다. 2천여결의 농토 중 정식으로 해마다 납부하는 토지는 절반이 안 되었다. 나라 토지와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는 양반 관리 등을  빼고나면 실제 그 절반이 조금 넘었다. 그런데 이번 하곡미가 천여석이 걷혔다. 평민들이 앞 다투어 낸 것이었다. 고을 백성들이 편안히 농사를 지어 수확이 늘자  스스로 세곡미를 낸 것이었다.

가을 추곡미가 들어오자 관청 창고에는 곡식이 쌓이고 있었다. 이방의 얼굴에도 윤기가 흘렀다. 예년 같으면 세금 독촉하러 동네마다 다니며 윽박질러 거두어 들이고는 했었는데 하곡, 추곡미가 창고에 넘치도록 쌓이고 어떤 자는 더러 밀린 세금도 바치고 있었다. 이대로 한 해만 더 지나면 창고를 한 동 더 지어야 할 판이었다.
준량은 고을 유지들을 불러 조촐한 잔치를 벌였다.

지난 여름 풍년이 들어 곡식이 잘되고 하, 추곡의 세금이 잘 걷히면서 창고에 가득 차고 있다고 하자 고을 양반 관리들은 이구동성 준량을 치켜 세웠다. 관청의 관리들도 처음으로 고기국에 이밥으로 한 끼를 채웠다. 고을 사또가 일일이 원로들을 찾아 다니면서 인사를 올렸다. 잔치가 제법 무르익자 준량이 정식으로 인사를 올렸다.
“여기 모인 여러 어른신들과 관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 추곡 합해서 천 여석의 곡식이 거두어져 창고를 가득 채웠습니다. 모두 다 여러분의 공입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스스로도 대견해하면서 가슴 뿌듯함으로 기분이 좋아 서로 음식과 술을 권하고 있었다. 마을 촌장으로서 자부심과 나름대로의 세력을 유지하고 다스린 결과라 자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슴이 뜨끔하기도 했다. 여기 모인 대다수 사람은 세금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준량은 자신을 치켜세우는 이야기에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조그마한 반상에는 또다시 작은 술병이 올려지고 삼십여명의 초청자 중 사또와의 겸상을 제하고는 모두가 반상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매년 정초 한 두차례 고을원이 불러서 대접하는 관례였지만 이번만은 좋은 기분이었다. 그 중 지난 번 재판으로 불만이 있는 자들도 있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자신들은 세금 한 푼  안내고도 권세를 누릴 수 있는 것은 고을 원님이 불러 대접 받는 것으로 과시하고 무지한 백성들을 관리 할 수 있는 증명서나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잔치가 무르익고 파할 때쯤 준량이 넌지시 말했다.

지난 여름 풍년이 들어 많은 양의 세곡미가 들어왔고 고을 원으로서 매우 흡족하다는 인사였다. 또한 다른 고을에는 향리가 서원도 세우는데 신령에도 향교는 있지만  전문적으로 과거를 공부할 수 있는 서원을 세웠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은연중의 압박이었다. 백성들이 여름 내내 고생해 하, 추곡 세금을 내는데 여기 모인 자들은 이 고을 최고 부자들로서 고을 땅 절반을 갖고도 세금 한 푼 내지 않으니 그 돈을 거두어 서원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순간 얼큰하게 오른 술기운들이 가시고 그 자리에 모인 자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적은 양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명년 봄이 되기 전에 조그마한 집이라도 세웠으면 합니다.” 준량이 재차 말했다.
“여기 오신 분들이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자제분들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방이 먹과 붓을 챙겨 반상 옆에 놓고는 한 사람씩 추렴했다. 지난 여름 은밀히 추진했기에 몇몇은 선뜻 거금을 적어내었다. 그중 창령이 본가인 영천 댁이 꽤나 큰 토지를 기증했다. 그러자 각 성씨 네들이 추렴서에 서명하고 일정한 양을 적어 올렸다. 잔치가 끝나자 이방이 말했다.
“학동 언덕 땅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서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기초를 닦고 목재를 구해다 집을 짓기 시작하면 명년 봄 즈음에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는 예산이었다. 추수가 끝나자 매일 수십 명씩 동원되어 역사를 하고 있었다. 백성들이 부역으로 나와서 일을 하자 내심 불만이었다. 정작 자기들의 자식은 공부할 수 없는 신분이기 때문이었다. 누구를 위한 서원이란 말인가. 준량 또한 그것이 불만이었다.
이방이 향리를 돌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집은 누구든지 부역에 참가하라는 사또의 명을 전했다. 그러자 며칠 후 하인과 노비들이 몰려왔다. 이대로라면 농번기를 맞기 전에 완공될 것 같았다.
준량은 스승인 퇴계에게 서원의 이름을 청했다. 그것은 예의고 또한 관례였다.

각 지역에는 향교와 서원이 존재했다. 향교는 위향소라하여 공자를 모시고 매년 제사와 유교 이념을 전승, 보전하고 충, 효, 인 등 나라의 기본 정교를 권장하고 지역 향촌을 이끄는 세력이었다. 서원은 지역의 유력한 인재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진사, 더 나아가 과거 공부를 통해 중앙 정부 관리로 나가는 학문의 경연장 이기도 했다.

스승으로부터 여러 명칭 중 <백학> 이라는 명칭을 받았다.
드디어 경상도 신령에 백학서원이 세워졌다. 신령 지역은 물론이요 영천지역까지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황준량이라는 걸출한 인재가 원님으로 있는 신령의 백학서원은 학문의 중심장으로 우뚝 섰다. 성균관 교수, 박사, 좌랑을 역임한 젊은 황준량이 며칠에 한 번씩 강론을 하자 어린 선비들이 감격하며 열중했다. 고을 원이 수시로 고을을 돌아보자 고을의 안녕이 눈에 띄게 나아졌다.

덕지덕지 붙이고 낡은 책들을 이방이 한 아름 안고 나왔다. 관청의 관리들은 매년 연례행사처럼 낡고 해진 문서를 여름이 오기 전에 말리면서 더러는 헤지면 고쳐 쓰고, 몇 자씩 덧붙여 쓰는 것이 관례처럼 이어져왔다. 버릴 수도 없고 보관하자니 관리가 어려웠다. 드디어 준량이 손을 대었다. 바로 백성들의 빚 문서였다.
글=조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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