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 30분 동안 가벼운 맨손 운동을 하고 곤히 자는 안식구를 깨워 차에 모판을 실었습니다. 논 대신 마당에다 기른 지 22일째, 오늘은 모내기를 하는 날입니다. 이앙기를 부리는 친구가 저희 것은 달랑 한 필지라고 해마다 새벽 참에 심어주고 아침 먹고는 다른 일을 하는 까닭에 올해도 저는 어둠발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어나야 했습니다.

모판을 싣고 논에 가니 여섯 시, 모판을 논둑에 다 내리고 나자 마침맞게 이앙기가 와서 바로 심기 시작했습니다. 저야 멀리 떨어진 논을 짓는 덕분에 모심는 날 하루 정도는 이렇게 새벽일을 하지만 부지런한 사람들은 저보다도 더 일찍 나와서 일하는 모습들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서 모내기는 끝났습니다. 시원해야 할 것인데 허망합니다. 1200평 한 필지의 모를 심는데 저 혼자 논둑에 서서 모판 몇 개 들어주고 빈 판대기 묶다보니 이앙기는 작업이 끝나서 어디만큼 왔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새벽이 아니라도 새참 먹을 시간만큼도 일할게 없으니 모든 농사일이 기계화된 지금 한 필지의 농사라는 게 참 우습고 싱겁기조차 합니다. 새삼 이러저러했던 옛날 생각에 잠길 것도 없이 네 귀퉁이의 개자리에 모 몇 개씩 때우고 잠시 논둑에서 있다가 모판 싣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감상적인 이야긴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논 저논 북적이는 사람도 없이 저 혼자 모를 키우는 논이 참 쓸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장기는 들어도 때를 놓쳐서인지 밥 입맛이 별로 없어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상을 물렸습니다. 한 열흘 조금 가라앉은 것 같은 아래턱 사랑니가 다시 붓고 솟아올라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하는 탓이기도 합니다. 치과에 갔더니 붓기가 내려야 뽑을 수 있다며 약 처방전만 주고 삼일 후에 다시 오랬었는데, 약은 다 먹었어도 일 바빠서 치과는 다시 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양쪽 위아래 어금니가 성한 것이 하나도 없고 빠지기조차 해서 한쪽이 휑하니 비었는데 사랑니마저 이렇게 말썽입니다.

사람이 잘 먹고 잘살려고 힘들게 일한다지만 저는 이빨 때문에 잘 먹기는 점점 글러지는 것 같습니다. 잘 먹기 위해서는 우선 이빨이 성해야 하는데 이까짓 농사 한 필지를 지어서 어느 세월에 이빨을 해 박는답니까? 속도 모르고 임플란트 심어라, 잘하는 데를 소개해 주마는 사람이 많지만 저는 우스개로 ‘외국에 나가서 차관이라도 좀 들여온 다음에 보자’고 농칩니다.

그러나 다른데 같잖고 이빨 아픈 것 참 견디기 힘이 들더군요. 치과의사들 돈 버는 것 보기 싫어서(!) 오기로 참고 또 참으며 통증을 멈추게 하는 손바닥 혈에 노린내가 나도록 뜸을 떠보기도 하지만 효과는 신통찮아서 모 잘 심고 와서도 이렇게 속이 꼬이고 짜증이 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빨은 아프라고 놔두고 일은 또 해야지요. 작으나 많으나 모내기가 끝났으니 이제는 밭에서 마늘 뽑고 콩 심고 깨 심고, 고구마 놓으려면 장마 전에 바쁘게 서둘러야 합니다. 하지만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일한 탓인지 상 물리고 커피 한잔 마시고 나자 몸이 그만 말을 듣지 않고 자꾸 처지기 시작합니다. 비가 오려는지 구름짓 해서 날씨마저 후텁지근합니다. 면도하고 머리감고 냇물에서 목욕하고 잠이나 한숨 잤으면 싶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마당의 치울 거리들, 이제 일 년 후에나 쓸 모판도 제자리에 싸놓아야 하고 바닥에 깔았던 보온덮개 비닐 부직포 따위와 군데군데 눌러놨던 돌덩이들을 보노라니 힘이 더 빠지고 막막하기만 합니다. 이럴 때는 제 속을 들여다보는 우렁이 색시라도 한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밥 차려준 제 안식구는 어디 갔냐고요? 한동네 사는 큰집 조카가 금년에 새로 펜션 하나를 지어서 숙박업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청소를 하러 갔답니다.

적당한 사람을 구해 쓰기가 어렵기 때문에 제 안식구에게 부탁한 것인데 농사일 하면서 짬짬이 틈을 내면 가용은 벌어 쓰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니 제 일이 조금 더 많아진 것이지요. 봄에는 주말과 휴일에만 나가서 일했지만 여름피서 철에는 한 달 동안은 아마 날마다 나가야 된다는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저 혼자 농사일을 해야 된다는 이야기지요.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는지 걱정이 됩니다. 저야 몸이 아프든 어쩌든 참고 견디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지만 농사일과는 달리 펜션 청소일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닌 모양입니다. 목욕탕과 주방의 식기들을 반짝반짝 닦아서 정리해야하고 청소기를 돌려서 먼지 한 톨까지도 잡아내야 하는 것과 이부자리를 햇빛에 말리고 시트 베갯잇 수건 따위를 빨아 끼우는 일들로 시간을 메우고 오면 그만 몸이 파김치가 되는지 의례 방에 드러누워 잠이 듭니다. 그러니 저보다도 우렁이 신랑이 더 필요한 사람은 제 아내이겠지요.

나이 먹을수록 일이 더 뻣세지는 것을 누군들 바라겠습니까만 살다보면 간혹 그런 때도 있는 모양입니다. 내가 조금 더 힘들더라도 그것이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면 부러 찾아 나서서 하지는 못할망정 주어지는 일을 즐거운 마음을 갖고 견디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이런 저런 생각 속에 조금 쉰 탓인지 이제 몸이 많이 가벼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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