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올해는 장마가 다른 해보다 일주일 정도 빨리 시작된다는 일기예보가 나오는군요. 보통은 6월말쯤부터 시작되고 저 멀리 남쪽에서부터 힘겹게(!) 밀고 올라오는데 이번에는 위쪽지방에서 내려온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가 삼십 몇 년 만의 일이라는데 그것은 하여간에 일찍 온다는 소식이 걱정입니다. 그 안에 해야 할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참깨의 경우는 장마 전에 싹이 나서 얼마간 키워놔야 비 피해가 없는데 저는 아직 씨앗도 뿌리지 못하고 이제 겨우 콩과 녹두만 심어 놨습니다. 깨는 마늘 뽑아낸 바로 그 자리에다 비닐을 걷지 않고 다시 종자를 뿌리려는 것인데 마늘도 아직 뽑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다른 일 다 제쳐두고 마늘부터 뽑기로 했습니다. 마늘은 조금 일찍 뽑아치우려다가 뽑아서 말릴 비닐하우스가 없는 탓에, 더군다나 그동안에 한차례 비가 온다고 해서 뽑아 놓고 비 맞추느니 비온 뒤에 뽑으려고 늦어진 것이지요. 그렇게 비를 맞춘 덕분에 흙이 물러져서 마늘은 뽑기가 참 수월했습니다.

처음부터 마늘 한 두둑을 저와 제 아내가 나란히 앉아 뽑아 나가기 시작했더랬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저는 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뽑았습니다만 이내 허리가 아파서 주저앉았습니다. 앉은걸음으로 뽑아나가다 보면 속도가 나지 않는 게 답답해져서 다시 일어섭니다. 하지만 또 금방 허리가 아파서 주저앉기를 거듭합니다. 이제 그 정도가 점점 앉은걸음 쪽으로 치우쳐서 한 두둑의 삼분의 이 정도를 그렇게 뽑았습니다. 이걸 일러서 몸뚱이가 예전 같지 않다고, 작년 다르고 금년 다르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일하다보니 나중에는 앉아서 뽑아 나가는 게 편해져서 서서 허리 구부리고 하는 일은 이제 못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마늘 한 두둑의 넓이에는 마늘이 열두 개 심어져 있습니다. 한 두둑을 저와 아내가 둘이 뽑으니 한사람이 여섯 개씩 뽑아 나가면 되겠지요. 저는 왼손 오른손을 거의 동시에 움직이며 뽑으니 빠르고 제 아내는 마늘 하나를 두 손으로 붙잡고 뽑으니 느립니다. 서로 나란히 앉아 뽑아 나가려면 제가 더 많이 뽑던지 쉬엄쉬엄 해야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탓에 그 ‘쉬엄쉬엄’ 이라는 것이 되지 않더군요. 오히려 끊어지지 않고 쑥쑥 잘 뽑아지는데 재미를 붙여 한참 속도를 내다보니 아내에게 두개를 남겨주고 제가 열개를 뽑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럴 땐 제 양손이 마늘밭 두둑위에서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듯 춤사위가 펄럭이듯 들숨날숨을 거듭하는데 그런 저를 보고 안식구는 ‘장풍 쓰는 것 같다’ 고 했습니다.

그렇게 마늘 한 두둑 뽑는데 대략 40분정도가 걸렸습니다. 오후 3시 반 무렵부터 시작해서 한 서너 두둑 뽑고 말려던 것을 “한 두둑만 더 뽑고 마칠까?! 좀 늦었지만 마저 뽑아버릴까?!” 서로 의기가 투합해서 마늘 한 마지기를 다 뽑아버리는 눈부신 성과를 내고야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처음에 아프던 허리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좀 무리를 했지 싶습니다. 밭에서 일어나니 허리는 구부정 앙가슴은 앞으로 내밀어져 양팔을 흔들며 걷는, 허리 아픈 이들의 그 전형적인 모습이 나도 몰래 지어져서 속으로 훗- 하고 웃었습니다. 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 모습이 또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고요.
바로 엊그제 제가 상쇠를 맡고 있는 이곳 풍물단의 단원 한분이 집을 짓는데 방 한 칸을 구들방으로 만들고 싶다고 저에게 부탁을 해 와서 일을 해드리게 되었는데요. 내외분만 자는 안방이라고 하여 방도 작았지만 제 일이 바빠서 보통 사흘을 걸릴 일을 하루 한나절 만에 대강 마치게 되었습니다. 제 일하는 것 구경하러 오셨던 나이 드신 단원 한분이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한마디, “자네는 일하는 것도 꼭 꽹매기 치듯이 하네 잉?” 하셨습니다. “예, 얼릉얼릉 허고 놀아 부러야지 어떻게 일을 흥그적 하니 한데요” “그려! 그려!” 맞장구까지 쳐 주셨습니다.

일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아주 오래전에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본 한 광경 때문입니다. 제가 탄 버스는 마침 이웃동네의 친구 집 앞을 지나가는데 친구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앓아누워 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나이 자신 분이니 의례 그러려니 여기고 무심히 지나치기 일쑤인데 버스차창으로 놀라운 모습이 비쳤습니다. 친구의 어머니가 집 앞 텃밭에 나와서는 거의 누운 자세로 호미질을 하시던 모습 말입니다. 그때는 봄이 한창이어서 방안에만 누워 계시기가 참 답답키도 했겠다 여겨졌지만 저는 그 모습에서 흙으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런 행동임을 느끼고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저도 늙고 병들면 저렇게 손에 호미 쥐고 흙 속에서 마지막으로 소멸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구요. 하지만 제 일하는 모습에서 스스로 아름다움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이제 그것이 느껴지는군요. 힘은 들어서 오래는 하지 못할지언정 일을 손에 잡으면 그 일과 제가 한 몸이 되어버려서 행위 그 자체만 있다가 때론 그것마저 까마득히 소멸해 버리는 경험 말이지요. 그것이 자연스런 모습이라면 아름다운 것 아닐런지요.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