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 위해 나라 채무까지 불태운 범죄인 ‘황준량’

사령과 판관이 떠나자 준량은 이방을 비롯해서 육방의 관리들을 동원해서 채무문서를 살폈다. 당년의 채무는 제하고 오래된 문서부터 하나하나 조사해 나갔다.
실로 방대한 내용이었다. 전체 문서 중 칠할 정도가 이행 불가한 문서였다. 준량은 이방을 시켜서 갑 을 병으로 나누어서 처리했다. 준량이 물었다.
“갑이 몇 명이요·”

“약 1할입니다. 을은 2할이고, 병은 7할입니다.”
이방이 아뢰자 준량이 꼼꼼히 챙겨보는 것은 을이었다. 이방의 관리들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각자 맡은 고을을 훤히 알고 있었다.
현감의 명령으로 분리했지만 매년 나가면 조금이나마 푼돈이 생기고 더 나아가 고을 백성들을 관리하는 권력의 힘이었다.

고을 현감인 준량은 나름대로 걱정이었다. 올해도 풍년인데 이곡까지 치면 천 여석은 거두어 들여야 하는데 현실은 못 받을 양이 열이면 아홉이 될 것은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라의 경사가 나도 방방곡곡의 부담은 눈물겨웠다. 각 고을 배정된 물량은 한양으로 실어 날랐다. 늘 그 행렬이 지나는 길목인 신령은 그들을 객사에 머물게 하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최소한 연 이백석 이상의 비용이 들었다. 신령은 팔공산 자락을 끼고 있기 때문에 약초와 산짐승 공납이 많았다.

매년 정해진 조세는 감당할 수 있지만 특별히 걷히는 공납은 힘에 겨웠다. 그래서 관리들은 백성을 조이고 고을 향촌의 양반 집안은 조세와 맞먹는 물품을 상납하여 나름대로 체면을 세웠다.
고을 원을 지내면서 끝없이 밀려오는 업무에 고을 백성들을 핍박하고 굶주리는 폐단이 너무 많았다. 글도 모르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인데 글 꽤나 안다는 지역 세도가들이 이리저리 피해나가는 것도 문제고 글을 몰라 덥석덥석 지장을 찍고 가는 무지한 백성들도 문제였다.
얼토 당토 않게 땅을 바치고 소작용으로 전락하여 헐벗고 굶주린 백성이 부지기수였다.
준량이 명령했다.

“갑과 을만 넣고 병은 동헌 뜰에 내어다 쌓아라.”
관리들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머뭇거리자 준량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관청의 문풍지가 바람에 바르르 떨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방은 듣거라. 병의 문서에 불을 지펴라.”

이방이 뒤로 넘어질 듯 놀라며 아뢴다.
“그것은 아니되옵니다.”
이방이 강력하게 항의했다. 나라 채무는 누구도 없앨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역무도한 흉악한 범죄나 마찬가지였고 나라 채무를 불질러 버리는 것은 역적이나 도둑 더 나아가 반란의 괴수나 할 짓이었다.

관청의 모든 관리들이 엎드려 청했다.
“아니되옵니다. 사또.”
준량은 멈칫했다. 그렇다. 저들이 불을 지른다면 크나큰 형벌을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너희들은 동헌 밖으로 물러가거라.”

육방의 관리들이 말렸지만 준량은 서너 등짐의 문서에 불을 질렀다. 넓은 동헌 뜰에는 준량만이 홀로 남아 불타는 문서를 지켜보고 있었다.
수십 명의 관리들은 문 밖에서 쥐죽은 듯 조용히 서 있었다. 검고 흰 연기가 지붕위로 곧게 높이 피어 올랐다. 
글=조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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