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핑계로 고향 금계로 낙향 ‘정든 신령 떠나’

준량은 사직서에 답변이 없자 재차 사직서를 올렸다. 후임 현령이 오기까지 재청하라는 목사의 권고만이 내려왔다.

여기저기서 사또를 찾아와 인사를 올리는 고을 백성들이 매일 수명씩 들이닥쳤다. 준량은 그들을 외면했다. 이방과 육방의 관리들이 그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준량은 또 다시 병을 핑계 삼아 고향 금계로 낙향하고 싶다는 간곡한 사직서를 올렸다. 목사가 발끈했다.

“아니, 근신하고 자중해도 모자랄 판에 사직서를 또 올려· 글 꽤나 아는자가 멋대로 방자한 일을 하면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른단 말인가. 아까운 인재라 죄를 면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경을 쳐도 단단히 쳐야 될 일이야.”

도승지가 판서와 마주 앉았다. 판서가 입을 열었다.
“신령 현감을 벌해야 하지 않는가?” 
도승지가 책상 위에 서찰을 두통 꺼내면서 말했다.

“근신하라고 명했는데 사직서가 또 올라왔소이다.”
판서는 불쾌했다. 관찰사나 목사가 적당히 처리 못하고 결과를 묻는 것이 화가 났다. 그렇다고 주상이 직접 명했는데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상주 관찰에서 속달이 도착했다.
“준량이 병이 깊어 고향으로 떠났답니다.”

승지는 처음 내용을 접하고는 적잖이 놀랐다. 관청의 채무를 태우다니 그것은 큰 죄였다. 게다가 주상이 직접 명한 관리가 초임 수령으로 한 일 치고는 너무 큰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고민하고 있었는데 두 번째 사직서가 올라와 판서와 의논하던 중 병을 빙자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떠난 것은 문책에 해당 하지만 적절히 처신한 현감이 속으로 반가웠다.

새벽녘 말 한필에 역관과 동행하는 준량은 초라해 보이기만 했다. 따르는 관리들을 멀리한 채 정든 신령 땅을 떠나고 있었다. 지난 수년 간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긴 날들이었다. 번거러움을 피하고자 전날 관리들과 인사를 나누고 새벽에 길을 떠난 것이었다.
팔공산 자락위에 소복이 내린 하얀 눈이 초겨울 새벽 햇살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역관이 군위에서 돌아가고 의성의 객사에서 하루를 머문 후 안동으로 향했다.
스승 퇴계를 뵙기 위해서였다.

준량은 그 곳에 스승 외에도 반가운 벗이 두 명이나 더 있었다. 이정과 조목이었다. 스승의 편지를 들고 신령으로 여러 번 왕래했었고 서원의 현판을 비롯해서 고을의 난해한 문제들을 함께 의논했었다.
그리고 가끔씩 자신의 서찰을 스승에게 전해주는 반가운 벗이기도 했다. 퇴계는 단양군수를 초임하고 낙향해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다.

퇴계는 준량에게 술잔을 건네면서 말했다.
“ 황중거, 또 사고를 치고 왔구만.”
안동 와룡천 저녁 노을이 무지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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