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장마가 져서 사흘거리로 비가 오는 요즈음은 몸이 조금 한가합니다. 물이 아무리 잘 빠지는 밭이라고 해도 지금은 들어갈 수가 없고 논은 급한 대로 초벌을 대강 휘젓고 다녔으니 그다지 바쁠 것도 없는 셈이긴 합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다가 와서 그랬는지 방송의 일기 예보로는 이곳 지역의 강우량이 86밀리미터라는데 집 옆을 흐르는 냇물은 웅덩이만 겨우 잠겨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이틀 사이에 또 그만큼의 비가 오자 그제는 출렁출렁 흘러갑니다.

첫 번의 비도 두 번째의 비도 참 얌전하게 왔습니다. 하루 낮과 하루 밤을 두고 세차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쉼 없이 왔는데 빗발을 몰고 다니는 바람이 가만히 뒷짐을 지고 있었던 까닭에 곡식 하나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한밤중이 지나면서부터는 빗소리보다 상류로부터 흘러오는 계곡물소리가 쏴아 하니 귓전을 두들겨서 그 시원한 소리에 어느덧 잠이 깨었습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습니다. 새는 날, 일을 해야 한다면 충분히 자둬야 되기 때문에 할일 없이 밤중에 깨서 몸을 뒤척일 일도 없겠지만 내일은 그럴 일이 없으니 깨어있는 것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덧 설핏 잠이 들었지만 귓속으로는 여전히 냇물이 출렁이며 흘러가더군요.

수돗가 옆에 놓인 절구통에는 밤새 물이 그득하니 고였습니다. 어머닛적 시절엔 간밤에 온 비의 양을 가늠하던 것이 이 절구통이어서 저는 지금도 여기에 담긴 물을 퍼낼라치면 “오오매, 비 무떵 와 버렸다!” 하시던 어머니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는 늘 무언가를 찧거나 빻느라 쿵쿵대던 절구질 소리도 듣습니다. 집 앞 텃밭에 심어놓은 옥수수며 푸성귀들이 양껏 물을 빨아들여 바람이 없어도 금세라도 뒤로 넘어질 듯하고 그 사이에서 자라는 쇠비름도 엊그제 손톱만하더니 손바닥만 하다가 이제는 맷돌짝처럼 퍼지며 자랐습니다.

장마철에는 해마다 짚신을 삼았습니다. 방안에 앉아서 밀린 신문을 들여다보는 것도 싫증이 나면 마루에 앉아서 내리는 비를 보며 손을 꿈지럭거립니다. 습기가 많아서 짚일을 하기에는 장마철이 딱 안성맞춤이지요. 지난겨울에 멍석을 짜고 남은, 손질된 짚 한 움큼을 가져다가 물에 적신 후 비틀고 두들겨서 부드럽게 한 다음 신을 삼습니다. 무엇이든지 처음 시작할 때의 그 명료함과 손끝에 부딪는 날카로움이 늘 저의 오관을 깨웁니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끝을 향해 치달아가지요.

그리고는 조용한 마무리. 짚신은 자기 발에 맞춰 한 쪽을 먼저 삼아놓고 나머지 한 쪽은 그것과 똑같게 삼으면 됩니다. 자기 발에 맞는 치수를 산정해서 날줄의 길이를 먼저 정해야 되고요. 짚신 한 켤레를 삼으려면 아무리 빨리해도 두 시간 반 이상이 걸립니다만 저는 늘 놀 양으로 하는 것이라 한나절입니다. 먼저 삼아놓은 것과 똑같게 한다고는 하지만 항상 뒤엣것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거나 넘쳐서 불만입니다. 그래서 다시 풀어버리거나 싹둑싹둑 잘라서 버리기도 여러 차례였습니다만, 지금은 웬만하면 자신에게 눈감아줍니다.

구한말에 수월이라는 중은 하루 종일 어느 산 고개턱에 앉아 짚신을 삼아서는 살길을 찾아 만주로 떠나는 사람들의 발에 신겨 주었다는데 조금 짝짝이라고 버렸을 리 만무합니다. 짚신을 삼을 때마다 저는 늘 ‘이번에는 여러 켤레 삼아서 발에 무좀 있는 사람들에게 좀 신겨 주어보려니’ 하는데 이상하게도 정성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남 주기 쉽지가 않더군요. 짚신은 저에게 ‘바로 이 지점이 너의 한계’라고 말해줍니다.

제 아버지는 신을 삼으시다가 벌떡 일어나 겅중겅중 빗속을 뚫고 주막집을 다녀오시곤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 대에도 짚신을 신지 않고 고무신을 신었으나 미끄러운 갯바위로 농어를 낚으러 가실 때만은 꼭 짚신을 신으셔야 했기에 삼으시는 건데 운 좋게도 그걸 보고 자란 덕에 지금 저도 이렇게 신을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현재라는 것은 언제나 과거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비 오는 날엔 어머니도 아침부터 쉬지 않고 손을 놀리십니다. 맷돌에 밀을 갈아서 가루를 장만해서는 애호박 썰어 넣은 수제비나 칼국수, 혹은 ‘낭와’라고도 하는 팥 칼국수를 만드시느라고 그럽니다. 비 오는 날 만드는 밀가루 음식은 손이 참 많이 가는 귀한 음식이지요.

짚신을 삼다가 술 생각도 나고 수제비 생각도 나서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집에 없는 술 먹으러 겅정거리고 밖에 나가느니 집에 사다둔 밀가루로 점심을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직접해보지 않은 음식 중에서 칼국수는 꼭 한번 해보고 싶던 것인데 밀가루반죽을 주무르고 치대는 것이 참 재미있더군요. 어디서 들은 말이 있어서 오래 주무르고 두드리고 밟고, 그러다보니 짚신 삼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서 겨우 한 켤레 삼는 일만 마치고 신총 꿰는 일은 미뤘고요, 냉장고에서 숙성시킨다고 한동안 놔뒀던 밀가루 반죽을 꺼내 안반위에서 늘리는데 참 신기하게도 백짓장처럼 늘어나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그걸 본 제 아내가 한마디 하시더군요. “너무 가늘면 맛없어!” 그럴 것 같았습니다. 역시 경험이라는 것이 중요 하다는 것 새삼 즐겁게 느꼈습니다. 좀 뻑뻑하게 끓여진 것도 저에게는 귀한 경험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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