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비오는 날이 일주일을 넘어 열흘째입니다. 구름만 잔뜩 낀 날과 하루 한두 차례 소나기가 내리는 날과 그 중간 중간에 잠깐씩 햇빛 나는 날이 섞바뀌어 칠월이 다 가고 이제 팔월입니다. 그 동안에 또 한 차례 논에 나가 논둑 가에서 뻗어나가는 풀을 매준 것을 빼고는 통 들일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덕분에 옥수수와 깨 심은 곳을 빼고는 풀과 곡식이 이제 똑같은 키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장마가 며칠 더 계속된다니 그러면 그때는 풀이 곡식보다 더 자라 있을 겁니다.

이렇게 비가 오기 전에 노란 플라스틱 콘티박스로 네 상자나(!) 딴 첫물 고추는 결국 말리지 못하고 죄다 나무 밑에 쓸어다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추 딴 첫날과 둘째 날 볕을 쪼이고는 내내 햇볕이 없었으니 골아버리기 딱 알맞았지요. 그래서 가위로 고추를 전부 반으로 갈라 발 위에 펴서 널 수밖에 없었는데 햇볕은 고사하고 바람도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바닷바람이라 마르기는커녕 곰팡이가 끼고 썩어갈 뿐이었습니다. 생각다 못해 선풍기를 꺼내다가 종일 돌려도 봤지만 소용없더군요. 반짝하는 햇빛과 시원한 바람이 하루만 불어준다면 그 고추를 흐르는 냇물에 깨끗이 씻어서라도 말려볼 수 있을 텐데,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니,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저희 집에 구들방이 세 개나 있으니 그중 하나에다 장작불을 몽땅 쳐 때고 거기에 고추를 말리면 되는 것입니다. 옛날엔 이런 경우에 다 그와 같은 방법을 썼으니까요. 하지만 왠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옛날보다 더 배가 부르니 땀 흘리며 아궁이 앞에 앉아 불 때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요. 하지만 제 아내가 눈에 띄지 않게 뒤란 감나무 밑 풀숲에 버린 고추를 보면 돈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농작물이 우리가 게으른 탓에 저 지경인가 싶어 마음이 씁쓸합니다.

이제 다시 두물고추 딸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마가 끝나지 않는 한 같은 일이 되풀이될 게 뻔해서 아예 날이 좋아지면 따리라 마음먹습니다. 그러면 고추가 나무에 달린 채 끝이 쭈글쭈글 말라가서 상품가치가 없어지며 다음에 익어야 할 고추가 늦게 익게 되겠지요. 까짓것! 팔아먹을 양도 나오지 않을 바에야 결국은 다 집에서 먹을 것인데 그러면 좀 어떻겠습니까, 따놓고 골리는 것보다야 열배 낫겠습니다. 그리고 고추 농사는 따서 말리는 일만 남았을 뿐 사실 다 지은 농사입니다. 그에 비하면 풀이 산더미 같이 자라는 다른 곡식밭이 더 큰일이지요.

일찍 심은 메주콩밭은 두벌 매주고 순을 지른 덕에 고랑까지 우거져서 풀 걱정이 없지만 늦게 심은 서리태는 이제 순을 지를 때인데 초벌도 매지 못했습니다. 순이 너벅너벅하게 자라서 날마다 이파리를 따 먹으면서도 들깨밭 역시 심은 채로입니다. 이것들은 이제 사람 어깨를 덮는 그 속에 들어앉아서 풀을 매야 합니다. 부지런한 농부들이야 아무리 장마가 길다 해도 곡식밭을 이렇게까지 놔두지는 않는데 제초제 쓰지 않는 유기농이라지만 남 보기에 부끄럽습니다. 외딴 밭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하지만 저는 차라리 남 일하지 않은 이 삼복더위 속에서 일하는 것도 괜찮다 생각합니다. 어차피 풀에 치여서 해마다 조금씩 때를 놓치는 것이 다반사인데 안달하고 속 끓여 봐야 더 덥기만 하고 소용없는 일이라 더울 때일수록 더위를 피하느니보다는 더위에 맞서는 방식으로 일을 해왔습니다. 지금의 콩밭 김매기가 그렇게 몸을 던져서 일하기 좋습니다. 한 시간이 채 되잖아 줄 줄 줄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그 땀을 즐기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서서히 더위가 느껴지지 않고 어느새 몸이 적응돼 있곤 합니다. 그것도 중독성이 있는 것인지 볼일이 있어 잠깐이라도 밖에 나가면 아스팔트와 차들에 지쳐 그만 콩밭이 그립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피서지는 콩밭인 셈입니다.

저는 사계절 중 유일하게 여름을 탑니다. 땀 많이 흘리고 덥다고 해서 찬물을 세 모금 이상 들이킨다든지 등에 물을 끼얹으면 바로 배탈이 나서 고생을 하며 기력이 떨어집니다. 날이 본격적으로 더워지는 칠월초가 바로 그때인데 한 열흘 고생을 하면 몸도 적응을 하는지 괜찮아집니다. 하지만 땀을 많이 흘리게 되면 밭 매다 일어설 때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되며 심한 어지럼증이 찾아옵니다. 저혈압성 빈혈 때문이라는데 해마다 콩밭을 맬 때면 어김없이 되풀이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두어 시간 김을 매다가 물이라도 마시고 싶어 일어서면 아찔하고 강렬한 현기증이 머리를 노랗게 내리눌러 나도 몰래 땅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기분이 참 괜찮습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순간에 제 살아있음의 존재감이 몸으로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사람이, 아니 저라는 사람이 참 모순덩어리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같은 일이 해마다 반복되는 농사일이 지겨워 늘 달아나는 것을 꿈꾸다가도 어느새 또 그것에 붙잡혀 편안해져 있으니 말입니다. 특별하고 새로운 것을 꿈꾸지만 돌이켜보면 항상 많은 사람들의 그 보통의 삶에서 한 치도 더 나가있지 못하는 모습 말입니다.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