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나자마자 날마다 폭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절기로는 입추인데 장마가 긴 덕분에 이제 막 여름을 맞는 것 같습니다. 중국발 열파가 우리나라로 밀려와서 동해안의 수은주가 섭씨 39도에 육박하고 이곳의 기온도 37도에 가까운 날 하필 저는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고추를 땄습니다. 일어나기야 어둠발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일어났지만 아침운동 하는데 한 시간, 아침 챙겨먹고 커피 한 잔 마시는데 한 시간, 그래저래 어영부영 하다가 집사람은 조카가 운영하는 펜션에 청소하러 가고 저 혼자 여덟 시가 가까워서야 고추를 따기 시작했습니다. 양이 얼마 되지 않으니까 혼자 따도 오전엔 끝나리라 여겼고 더우면 까짓것 얼마나 더우랴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우스 안에 들어가니 이거 장난이 아니더군요. 양 옆과 출입문을 한껏 열어놨는데도 안에 들어가니 벌써 숨부터 콱 막히는 거였습니다. 뜨거우리란 것은 각오했지만 그것이 상상이상이라 마치 사우나에 들어온 듯 땀이 나기 시작하여 순식간에 옷을 적시고 신발 안에까지 가득 고였습니다. 긴 장화 신고 논에 가서 일할 때면 다리에서 난 땀이 어디로 갈 데가 없어서 장화속이 질척거리는 일이야 늘 있는 일이지만 이러기는 또 처음입니다. 하기는 하우스 안에서 고추를 따는 것도 처음일이긴 하지만서도요. 고추의 키가 커서 일어서서 따야 하는데, 일어서면 바로 머리위에 화롯불을 이고 있는 듯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가 비닐하우스를 달구어서 일어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고추고랑에 무릎으로 서서 딸 수밖에 없었는데요,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는 그런 상태로 네 고랑 중에 두 고랑을 따고나자 제 몸은 벌써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시간은 열시쯤이나 되었을까요? 누가 봐도 그 상태로 더 일하는 것은 무리라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저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기왕에 한번 버린 몸, 내친김에 마저 해버리자고 제 마음이 자꾸 저를 꼬드기는 것입니다. 이 견딜 수 없이 지겨운 노동을 남겨놓았다가 다시 또 하고 싶은 것이냐고, 그러면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을 것이라고, 이깟 더위에 져서야 되겠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집에 와 소금 반 숟갈에 물 한 병을 마시고 신발도 벗어버리고 다시 고추를 땄습니다.

그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이야 멈춤 없이 흐르는 것이고 내 손놀림도 멈추지 않는 한 언젠가 끝은 나게 돼 있다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고추는 이때껏 퍼렇다가 땀으로 지친 농부의 손길이 닿아야 비로소 빨개져서 고추가 된다’는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말하자면 시상이 떠오른 것이지요.

그러자 그 생각이 다시 새끼를 쳐서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도 처음엔 퍼렇다가 왜 나중엔 빨개질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대로 나아갔습니다. 일찍이 요절한 어떤 시인이 ‘혁명의 색깔은 왜 붉은가’라고 했는데 그게 떠오르기도 했던 것이지요. 퍼런 고추가 갑자기 빨갛게 될 리 없고, 붉은 고추와 혁명이 그 어떤 연관도 없지만 무릇 시라는 것이 늘 이렇게 불순할 수밖에 없고. 때론 얼토당토않은 것이어서 다만 무한한 언어의 영토를 헤매는 사이 어느덧 더위도 잊고 고추는 거의 다 따져 있더란 것입니다.

그리고는 더위와 땀 속에서 오기로 일을 마친 게 오로지 대단하게 느껴져서 제 스스로 기꺼워 콧노래를 부르며 고추를 날라다 마당에 널었드랬습니다. 이번에 딴 고추는 두 번째로, 노오란 플라스틱 콘티박스로 열 박스나 되었고요, 그걸 고루 펴 널자 마당이 가득해져서 참 옹골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물론 그제야 여유롭게 수돗가에 앉아 옷 벗어서 맑은 물이 좔좔 흐르게 빨아 널고 씻고 점심을 먹었고요, 조금만 따고 쉬었다가 저녁때 같이 따자던 제 안식구가 와서 보면 놀라겠다는 생각에 흐뭇하기도 했습니다. 밭 맬 것이야 이루 말할 것 없이 많지만 이날은 참 마음이 느긋해져서 오후 다섯 시까지 내쳐 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시원할 때 조금 꼼지락거리고 일을 해야 저녁밥이 잘 들어갈 것 같아서(?) 작업복을 갈아입고 토방을 내려섰습니다. 그리고는 고추를 보는데 무언가 좀 희뜩하니 이상했습니다. 그게 한두 개만 그런 게 아니고 전체가 다 말이지요. 아뿔싸! 불과 서너 너덧 시간 만에 고추가 그만 뜨거운 볕에 데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가 왜 그 생각을 못 했나 모르겠습니다. 비닐하우스 안에다 널 때야 처음엔 까만 차광막을 씌우니까 그럴 일이 없지만 밖에서도 볕이 뜨거우면 익는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고추를 따면 하룻밤쯤은 그냥 포대째 놔두던지 아니면 그늘에서 한 이틀 둥굴렸다가 볕에 내 말리는데 무슨 생각을 하느라 그걸 까먹고 두물고추 그 좋은 것을 다 버려놓느냔 말입니다. 저것은 이제 말려봐야 거의 다 희나리가 될 뿐입니다.

시란 놈에게 전혀 책임이 없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가 아직도 농사꾼 이름값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개뿔! 그러면서 무슨 다른 것을 하겠다고 때때로 스스로 반란인지 원,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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