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지 마세요”

 
기껏해야 갓 스물을 넘긴 순백의 소녀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나고 소녀들은 그대로 버려졌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진 채로. 그리고 광복 68년이 흘렀다. 여전히 일본정부는 사죄 한마디 없다. 그러는 동안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타계했다. 이제 평균 연령 87.2세로 57명만이 생존해 있다.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광복절’이다. 해방이후 나라와 주권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끔찍했던 지난 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지옥 같은 시간들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었던 여성들을 말한다. 지난 1930년대 초부터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한 1945년 8월 사이에 걸쳐 일본군의 성 위안을 위해 위안부를 집단적으로 동원하고 관리했다.
당시 일본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양한 연령의 여성들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끌려갔다. 특히 세상물정이 어두웠던 경상도와 전라도 시골 지역 사람들이 많이 연행되어 갔다.
일본군 위안부 생활은 말로 다 표현 못할 정도로 끔찍했다. 전쟁터에서 잔혹해진 일본군인들이 위안부 여자들을 짐승같이 성폭행 했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 거부하면 매를 맞았고, 철저히 감시하는 일본군 때문에 도망가는 것은 꿈꾸기도 힘들었다.
이렇게 수많은 여성들은 군의 사기 진작 등 효과적인 군사 활동을 꾀하려는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지울 수 없는 이야기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위안소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위안소를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자신들이 일본군 위안부들에게 했던 전쟁 성범죄의 잔혹함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짐승같이 성 욕구를 해소하는 대상으로 다뤘던 여성들을 전쟁에서 짐과 동시에 산 채로 땅에 묻어버리거나, 자살을 강요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였다. 겨우 살아남은 몇몇은 전쟁터에 그대로 버리고 가버렸다. 생존해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

현재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그 때 당했던 일 때문에 몸이 너무 병이 들어 이젠 약 없이는 하루도 생활할 수 없게 됐다. 어떤 할머니들은 일본 군인한테 맞은 상처로 귀가 잘 들리지 않고, 팔은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일본군이 칼을 휘둘러 낸 몸의 흉터자국 때문에 창피해서 목욕탕에도 못 간다.

◆매주 수요일, 거리로 나서는 할머니들

우리나라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관심을 갖고 지원을 시작한 것은 할머니들의 용기가 큰 힘에서 나왔다.
일본군 위안부는 대부분 위안소 경험에 대한 수치심으로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렸다. 때문에 가슴 아픈 일들이 묻혀 지는 듯 했다. 그러나 1987년 여성단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 1988년 윤정옥 교수의 ‘정신대의 발자취를 따라서’가 발표되며 여성 단체들이 본격적으로 위안부에 대한 실태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故김학순 할머니의 용기가 신호탄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위안부임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연 것이다. 그렇게 위안부 할머니들의 투쟁이 시작됐다.
일본 위안부 할머니들은 지난 1992년 1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

‘수요시위’라 불리는 이 시위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대해 관심을 가져줄 것을 사회에 호소했다. 또 진상규명, 범죄인정, 공식사죄, 법적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등 여섯가지 사항을 시행할 것을 일본정부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할 뿐이다. 심지어 “스스로 위안부가 되었다거나 어쩔 수 없는 전쟁의 결과였다”는 망언을 하고 있어 할머니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일본정부 사과 반드시 받아내야

“일본이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저는 절대 못 죽습니다. 돈도 필요 없고 잘못했다는 일본의 사과만 듣고 싶습니다.”
최근 중국에서 열린 ‘제1회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기념 국제심포지엄’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하상숙 할머니의 말이다. 그리고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위안부 신고하신 할머니 234명 중 57명만이 생존해 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일본군 성 노예 전범 국제법정에서 증언을 통해 승소를 이끌어낸 역사의 산 증인인 이용녀 할머니도 광복절을 며칠 앞둔 지난 11일 향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머지않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두 이 세상을 떠날 날도 올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들이 사라진다고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범죄사실을 인정하고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는다면 후대가 대신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꾸준히 일본정부에 요구해야 한다.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짓밟은 반인륜적인 범죄는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서울 안국동 주한일본대사관 앞,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시에 건립된 ‘평화의 소녀상’이 역사를 바로잡는 상징이 될 것이다.

할머니들의 외침

#스무살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던 어느 날, 혼자 집에 있는데 두 명의 일본군인이 왔다. 그들은 나를 데리고 기차역으로 가서는 화물칸에 다른 8명의 여자들과 함께 실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영문도 모르는 채 어디쯤 갔을까, 기차 문이 열리고 들판으로 끌어내려 윤간을 했다. 반항을 하면 총구로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내가 속은 거구나, 이제는 죽었구나’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기차는 또 어디론가 출발했다.
 <故김의경 할머니>

#스무살, 어떤 조선 남자가 공장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하여 여자들 30~40명 쯤 같이 따라갔다. 기차에 몸을 실코 중국 목단강에 내리니 일본 군인들이 우글우글했다. 너무 무섭고 겁이 났다. 그저 매일 울기만 했다.
 <김순옥 할머니>

#사냥당한 동물처럼 구석에서 웅크린 채 기도할 시간을 간청했고, 내가 기도하는 시간에 일본군인은 옷을 벗었고, 겁탈 당하는 동안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렀다. 찢겨진 옷가지를 들고 목욕실로 달려가 피가 터질 때까지 몸을 씻고 또 씻었다. 지옥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이용수 할머니>

#16세에 끌려가서 저항하다가 무수히 맞아서 고막이 터졌다.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아서 지금도 온몸에 상처투성이다. 하루에 40여명의 성 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수차례 자살을 시도 했지만, 죽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남았다.
<김군자 할머니>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기가 막힌다. 그 어마어마한 군인들이 강제로 달려들 적에는 정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 생각을 안해야지, 하면 내 마음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故김학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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