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해가 지면 이곳에 올라와 밤을 지세네’

소에서 내려 일행을 기다리는 지번을 본 준량은 마치 한 마리 학처럼 더 없이 맑고 깨끗한 풍채를 한 그의 모습에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읍하며 고개를 숙였다. 가족을 청풍에 두고 단양 강변과 청풍나루를 오가는 강가에 지은 조그만 초막은 깨끗하다 못해 청아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선생님, 한양에 갔다 오는 길에 이곳에서 여러 날 묵어도 되겠습니까?”
준량의 갑작스러운 청에 지번은 웃으며 말했다.
 “허허, 한 고을을 책임진 자네 같은 사람이 어찌 이런 조그만 초막에 기거하겠는가.”
준량은 한양에 여러 날 머물면서 여러 지역 선비들과 담화를 나누며 지난날의 회포를 풀고 있었다.

준량은 오랜만에 성균관에도 들렀다. 교수, 박사로 재직하며 일한 그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그를 알아본 몇몇이 반갑게 인사를 했고 강론도 부탁했지만 준량은 거절했다. 근신하고 있는 입장에서 여기저기 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토정과의 약속도 있어 그의 본가가 있는 남문 밖에서 그를 만났다. 토정은 준량보다 며칠 늦게 구담을 출발해서인지 아직 여독이 남아있다며 그를 강변으로 데리고 갔다.

그 곳에 도착한 준량은 깜짝 놀랐다. 마포나루 강변 절벽에 우물정자의 토담이 높게 솟아 있었다. 나무로 우물정자를 짓고 그 사이사이 진흙을 발라 높이는 대략 서너 길은 되어 보였다.
준량은 좁은 안으로 들어가 토정을 따라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위에는 어른 몇 명이 누울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었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확 트인 경관이 제법 좋았다. 토정이 말했다.
“해가 지면 난 이곳에 올라와 밤을 지세네.”

그는 이곳에서 여러 날씩 밤을 지새우며 많은 생각을 하며 지냈다. 모든 만물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이치에 맞게 이어져 움직이고 있다고 믿었다.
사람과 물, 사람과 땅, 사람과 하늘, 무수히 많은 별들도 그 움직임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고 앞으로도 그 범위 안에서 윤회하고 결속 받으며 즐거움과 슬픔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인간에게 평온을 찾는 길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더 나아가 해결책을 찾는다면 스스로 불행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것은 경주에 있는 첨성대를 본떠 만든 것일세.”
준량은 토정이 내민 물건을 유심히 보며 말했다.

“그것은 돌이지 않은가.”
“그렇지... 황중거, 내가 왜 호를 토정으로 지었는지 아는가.”
토정은 지난 날 과거를 단념하고 개성에서 화담 선생에게 수학했다. 그 때 선생이 지함에게 운을 띄운 것이 흙이었다.

황진이에게는 작은 미물도 하다 못해 개미와 땅속의 벌레도 사람과 같이 돌고 돈다고 말하여 그녀는 평생 그것들을 보는 시각이 남달랐다.
그래서 훗날 유언에도 관을 씌우지 말고 그냥 개미와 벌레들의 밥이 되도록 장사 지내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토정은 그때부터 흙과 사람, 흙과 하늘, 흙과 물, 그 중에 사람의 역할 등을 평생의 운명으로 다듬고 있었다.

토정은 그런 곳에 유수한 인재 황준량을 데리고 올라온 것이다. 그는 비장한 음성으로 준량을 바라보며 한강을 가리켰다.
“저 강의 물은 항상 여름에 넘치네. 겨울이면 낮게 꽁꽁 얼지. 더울 때는 만물이 늘어나고 추울 때는 작게 오그라드는 모습이 마치 인간사와도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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