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참 꿀과도 같이 다디단 비가 내렸습니다. 여름 장마가 길었다고는 해도 비다운 비 한번 오지 않고 지나가서 목이 말랐는데 날씨마저 연일 40도 가까이 달아올랐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은 기간으로야 그리 오래되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워낙 폭염이다 보니 울안에 심은 나무들도 가지 끝이 군데군데 말라가던 중이었고요, 그러니 뿌리가 얕은 화단의 꽃들이 죽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어디 겨를이나 있어야지요. 콩꼬투리가 맺힐 땐 비가 자작거려서 꼬투리에 물이 잘잘 흘러야 된다는데 저러다가 빈 쌈지만 거둘까 오로지 그 걱정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가 나쁘면 다른 하나는 좋은 법이어서 올해는 가문 탓에 모두들 참깨와 고추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셋만 모이면 한결같이 입을 모았습니다. 이른 깨를 베어서 털었더니 깨가 꼭 쌀같이 뵈더라는 둥, 누구는 고추 2천 포기 심었는데 김 담는 망으로 일흔다섯 포대를 땄다는 둥 비록 남 이야기라도 옹골져서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벌써부터 고추나 깨 값이 싸서 탈이라고 혀를 차기도 했습니다. 저도 금년에는 심던 중 가장 많은 깨를 심었는데 마늘밭 뒷그루로 심어서 그런지 거름기가 많아서 이파리가 새카맣게 우죽만 크다가 꼬투리가 달리기 시작하여 지금은 제 키를 넘게 되었습니다. 밭 전체가 깨로 꽉 찬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저것이 가물었기에 그렇지 비가 잦았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입니다.

잘되는 농사는 더 잘되게 하려는 것이 사람 마음이어서 한 마지기나 되는 깨밭의 깨 우듬지 꽃을 비 오기 전의 그 유난스레 더운 날 따주기도 했습니다. 깨가 사람 키와 가지런하니 키 작은 제 아내는 여간 땀을 잘 안 흘리는 체질이어도 금세 윗옷을 흠뻑 적셨습니다. 사람이나 작물이나 이럴 때는 소나기 한 줄금 맞아보는 게 원이겠는데, 칠년대한 가문날도 하루만 더 비가 오지 말라는 사람 있다더라고 제 깨를 생각하면 한 일주일쯤만 더 있다 비가 왔으면 하는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그 옛날 짚신 장수 아들과 나막신 장수 아들을 둔 어리석은 부모 마음이 지금 제 꼴인 셈이어서 이젠 콩 걱정은 덜었는데 하루 사이를 두고 깨가 걱정입니다.

그렇긴 해도 이 비가 어디 자잘한 깨알 같은 제 마음처럼 와주는 것이겠습니까, 다 한울님 마음먹은 대로 공평하게 하는 것이겠지요. 비가 와서 일을 못하는 까닭에 그 이튿날 그동안 모아둔 몇 가지 볼일로 읍에 나갔습니다. 볼일 중 하나는 안과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병원 문턱을 넘어서려다 말고 돌아 나왔습니다. 약 3주일 전에 땀을 한차례 심하다 싶게 흘린 뒤부터 눈곱이 끼고 눈이 침침해지더니 그 증상이 나아지지 않고 땀만 흘렸다 하면 계속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녁에 신문이라도 한 장 들춰볼라치면 더욱 눈이 뻑뻑하고 흐려서 불편하기도 하고, 그냥 놔두면 이런 상태가 고정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 병원에 가 보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비 때문에 이틀 동안 일을 쉬고 땀 흘리지 않으니 조금 나아진 듯해서 에라 견뎌보자 하고 돌아섰던 것입니다. 제가 땀 흘려 눈 아픈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했더니 그가 일러주며 좁고 기다란 수건 한 장을 찾아주더군요. 일할 때 이마에 질끈 동이고 모자를 쓰면 땀이 눈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괜찮다면 굳이 병원에 가서 내 돈 내고 아쉬운 소리 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 다음에는 농기계 대리점에 가서 경운기 쟁기 보습을 한 장 사고 철물점에 가서는 곡식 까부르는 키 하나를 샀습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쓰던 키가 있었는데 저는 키질을 할 줄 몰라서 쓰지 않고 놔두었는데 오래되니 낡고 헤져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키질을 왜 할 줄 모르겠습니까, 잘못한다 뿐이지요. 제가 농기구 중에서 익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이 오직 이 키인데 농사지어 거둔 곡식의 쭉정이를 골라낼 때 기계를 쓰지 않는 한 키만큼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단 몇 번의 키질로 곡식의 겨나 검불, 쭉정이와 벌레 먹은 것들을 간단하고 깔끔하게 골라내버리는, 단순한 것 같은 그 키질이 사실은 마술과 같은 어려운 것이어서 옛 어른들도 못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그것을 제대로 한번 배워서 익히려고 했는데 이번 비 오기 전에 두어 차례 따낸 녹두, 속이 다 들여다보일 듯 보석 같은 낱알을 보면서 더욱 그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햇빛에 마르며 사방으로 뙤어 달아나는 녹두를 멍석 하나에 가득 널어 바심을 해서 키질한 녹두는 다시 더 손질할 것 없이 그대로 한 되 두되 팔아서 어머니는 저의 추석빔을 사주셨습니다. 그것이 아스라하기도 하고 어제일 같기도 합니다. 깨도 키질을 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키 하나를 사면서 이런저런 생각과 계획에 마음이 부풀었습니다. 어머닛적 연장 하나를 장만하면서 그것을 통한 옛사람과의 연속성과 연대감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집에 가져와 부엌 벽에 세워놓으니 마음이 환해지고 편안합니다. 이것이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것이기 때문일까요? 이날은 밤을 새우며 비가 또 많이 내려서 불과 이틀 사이를 두고 이번에는 비를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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