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조짐도 없이 날이 이렇게 갑자기 추워져도 되는 것인가요? 요 며칠 방에 불을 때지 않으면 추워서 잠을 자지 못할 지경입니다.
 예년 같으면 9월 하순 쯤에나 불 때는 시늉으로 한 부석 넣고, 그것도 이틀이나 사흘에 한번 그리 하다가 차차 많이 때게 되는데 올가을은 9월이 되자마자 날마다 불을 땝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사방천지가 땔 나무이니 걱정이 없지만 보일러를 돌려야 하는 분들은 비싼 기름값 때문에 벌써부터 걱정될 것 같습니다.

날이 추워져서 한 가지 좋은 게 있다면 고놈의 모기가 눈에 띄게 없어진 것입니다. 저희 사는 곳이 산 밑인지라 해만 조금 설핏하면 모기의 극성 때문에 밖에서는 무얼 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모기 걱정 하나는 덜었습니다. 미끔유월 어정칠월 고시랑팔월 동동구월이랬다고 추석이 낀 9월은 언제나 몸도 마음도 바쁘고 고단합니다.

또 차례를 장만하고 여기저기 인사를 챙길 걱정에 나도 모르게 없는 살림을 탄하게도 되지요. 돈이야 저한테는 처음부터 없는 것이었으니 그것을 새삼 더 걱정할리야 있겠습니까만 몸이 고달픈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추석 때도 여느 때처럼 일이나 하고 있는 것이라면 바쁘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겠지만 멀리서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들이 와서 한데 모이는 날인데 그럴 수야 없겠지요. 해서 단 며칠이라도 마음 편히 보내기 위해서 일을 좀 당겨서 미리미리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엊그제는 김장 무와 갓, 그리고 쪽파를 심느라 하루를 꼬박 채웠습니다. 한 달 전쯤에 퇴비를 뿌리고 갈아엎어두었던 밭이 거름기가 조금 부족한 듯해 다시 완숙 퇴비를 더 뿌리고 갈아서 쇠스랑으로 몇 골 두둑을 만드는데, 옆 눈질 한번 하지 않았어도 점심때를 훌쩍 넘기고 말았습니다. 불과 일주일 전만해도 오후 네 시 이전에는 더워서 일을 하기 힘들던 것이 날이 갑자기 서늘하게 변한 탓에 점심 먹고 바로 다시 일을 할 수가 있어도 가을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해가 짧게만 느껴졌습니다.

무 종자를 넣고 물을 주고, 마르지 말라고 짚을 덮어주고 나서 갓 씨앗을 뿌리고 나니 이미 해가 졌습니다. 그래서 쪽파는 내일 심을까 하다가 한번 마음먹은 일, 아귀를 지어버리고 싶어서 날이 저물도록 마저 일을 마쳤습니다. 자잘한 일이어도 하루 종일 쉼 없이 종종거리니 일을 마치고 일어설 때 저도 모르게 아구구구 소리가 나오더군요. 이제 돌아서서 내일, 모레 사이에 배추모종을 옮기면 김장채소 농사는 끝입니다.

그러고 나면 바로 깨를 베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은 시퍼런 기운이 많이 남아있지만 전체로는 누런색으로 변해가는 저 속도가 꼭 추석과 맞물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깨는 밑에 달린 쌈지꼬투리가 한 두 개씩 익어서 뙤어야 베는 것인데 금년에는 참 희한하게도 깨가 저리될 때까지 태풍 한번 없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이면 거의가 한번쯤은 “내가 심었으니 올해 그게 잘될 턱이 있나” 하며 자조 섞인 말을 하게 마련인데 금년에는 한울님이 깨 심은 농부들을 어여삐 보셨나 봅니다.

추석 전에 비닐하우스 안에 심은 고추도 한 번 더 따야 되고, 그러고 보니 벌초도 아직 끝내지 못했습니다. 종손 집안이어서 벌초만도 열 몇 분을 해야 하는데 조카들이 모두 그런 일에는 다투어 열심인지라 벌써 몇 군데는 저들이 다 해놨지만 멀리 산속에 모신 할아버지 몇 분은 아무래도 제가 앞장을 서야 합니다. 제 위에 형님들은 돌아가셨거나 이제 나이가 많아지니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이 어연간 제 몫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몸을 쓰는 일로 어른 노릇이란다면 명절이 무슨 걱정이겠습니까만 아무런 대책 없이 시간은 다가오고, 그런 다잖습니까? 똑같은 조카라도 술 사주어야 하는 놈 있고 떡 사주어야 하는 놈 있다고요. 아무리 돈에 구속받지 않으려니 생각해도 나이가 점점 먹어가니 옛날엔 눈감고 모르쇠 넘겼던 것들, 그 술 사주고 떡 주어야 하는 일들이 이제는 자꾸만 눈앞에 생겨납니다.

그러나 올해도 또 어쩔 수 없다면 그냥 세월의 흐름에 맡겨두고 묵연하게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일이란 이런 때를 견디게 하는 좋은 방편인 듯도 합니다. 그제 어제 오늘은 내쳐 풀만 벱니다. 백로를 넘기면서부터 이슬이 부쩍 많아지고 풀들도 이제 잘 자라지 않는 것 같아 이번 한번만 베어주면 올해는 끝일 것 같기도 합니다. 보통은 밭둑만 깎는 것을, 추석이므로 집 주변의 눈이 미치지 않은 여러 곳과 밭둑에 맞물린 나무들이 심어진 하천부지, 한길로 이어진 진입로주변은 더 말끔히 깎습니다.

벌초꾼들이 부쩍 늘어난 요즈음 오가는 사람들의 눈을 시원하게 해주고도 싶었습니다. 풀을 베면서 얼핏 올려다본 하늘이 갑자기 파래진 듯 오늘따라 유달리 높아 보여 가슴 한 편이 서늘해집니다. 애써 쌀쌀한 날씨 탓이려니 대수롭잖게 옷깃을 여며보지만 성글어진 하늘의 별자리만큼씩 실은 자신의 내면을 채워야 되는 때임을 몸이 먼저 아는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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