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명절 쇠러 집에 내려온 딸애들의 일손을 빌려서 몇 가지 일을 좀 했습니다. 항상 겪어보지만 잘 먹고 놀기만 하면 명절도 탈이 생기는 법이어서 적당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하긴 그래봤자 명절에 무슨 큰일을 하겠습니까, 그저 식구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며 할 수 있는 가벼운 것들이겠는데 이번에는 들깨 잎과 도라지 종자를 따고 또 마늘 종자를 까는 일을 하며 추석을 보냈습니다. 일손이 세 곱절 늘어나니 정말 모든 것이 순식간에 끝이 나버리더군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모여서 잠깐 웃었는가 싶은데 어느덧 일이 끝나 있곤 했습니다. 이렇게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하루 두세 시간씩만 일해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천국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는 저대로 명절을 보내는 동안 집 옆의 돌담에 잇대어 나뭇간을 하나 짓기 시작했습니다. 산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제집이 너무 훤하게 들여다보여서 그곳을 조금 막아서 지붕을 하면 겨울에 땔 삭정가지 나뭇단을 들여놓을 수 있겠다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해마다 마당에 쌓아두고 비닐로 덮어두곤 했는데 항상 그걸 들춰내고 나무를 가져다 쓰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기초는 돌로 하고 흙을 이겨서 기와로 양옆의 벽을 쌓았습니다. 하루에 한나절씩, 사흘을 쌓았는데 제법 모양이 되어갑니다. 애들은 자꾸 옆에 와서 들여다보고는 이제 좀 쉬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남들 놀 때 일하는 것이 나의 악취미’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 나뭇간은 다들 노는 때 짓는 것이니 거저 생긴 것이나 다름없겠지요.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추석이라고 마냥 손놓고 계시지 않으셨던 것 말입니다. 제 생각엔 오히려 추석 때 일을 더 하셨지 않나 싶습니다. 명절이 돌아오면 어른들 누구나 그러했겠지만 밤을 꼬박 새워서 나물하고 송편을 빚고 낮에는 또 하필이면 그때 익어서 뙤고 있는 깨나 녹두 때문에 밭에가 계시지요. 저는 어린 마음에도 명절 때 어머니가 밭에가 계시면 마음이 불안해서 자꾸 밭으로 치달아 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음음음…’ 어머니는 혼잣소리로 노래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노는 것은 밤에, 그것도 누님들의 강강술래를 구경하며 잠깐 기뻐하시는 정도였달까. 지금 저의 딸애들은 제 일하는 것을 보면서도 어릴 때 제가 느꼈던 불안 같은 것은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말은 쉬라고 하면서도 울안에서 아빠가 콧노래를 부르며 무엇인가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좋다고 생각하겠지요. 시키지 않아도 냉장고에 시원한 맥주가 있다며 상에 차려 들고 와 나무그늘에 놓고 저 한잔 나 한잔, 대작을 할 만큼 나이를 먹었고요, 세상 돌아가는 것과 인생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 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명절이 가고 오늘이 어제인 것처럼 어제가 내일인 것처럼 다시 나날의 시작입니다.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채로 오늘을 맞고 내일을 기다립니다. 애들이 모두 떠나서 잠시 휑한 생각이 들다가고 그 공간에 채워진 고요와 평화가 지난날의 그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으로 안심입니다. 저는 나뭇간 쌓는 일을 계속하고 있고 아침저녁으로 배추밭을 들여다보며 거세미란 놈을 잡아내고 오늘은 깻조배기 위에서 유유자적 하루세끼 식사를 해결하시는 멧비둘기란 놈들 욕을 해대며 아직 마르지 않은 깨를 텁니다. 추석 전에 베었는데 겉보기와는 달리 베면서 보니 키만 멀대처럼 크고 대궁도 성글게 서 있어서 한마지가 되는 깨밭에서 겨우 깨 70여조배기 베어 묶어 세웠을 뿐입니다.

조만간 비가 온다고 하더니 푹푹 찌는 날씨가 정말 여름 못지않게 덥습니다. 아침 한나절, 그동안 날이 참 좋아준 덕에 깨는 대강 말랐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마르라고 놔두고 집안을 정리한 다음에 오후 한시부터나 깨를 털기 시작했는데 더위 때문에 힘이 들었습니다. 생각하기론 저희 내외 둘이 한다고 해도 넉넉잡고 두 시간이면 되겠다 싶었지만 저녁나절 내내 해야 했습니다. 잘 되었네 못 되었네 해도 심은 면적이 있어서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인데 송소래미를 다 골라내고 보니 보기와는 다르게 깨도 제법 나왔습니다. 포대에 담아 와서 저울에 올려보니 30킬로그램이나 되었습니다. 깨는 초벌 털 때 거의 다 나오는 것이라 이제 몇 킬로나 더 나오겠습니까만 아직 잘 마르지 않은 것을 비 맞추지 않으려고 일찍 턴 탓에 그래도 깻대에 남아 있는 게 조금은 더 있을 듯합니다.

 뒷정리 하고 씻고, 저는 또 버릇처럼 뒤 안으로 돌아갑니다. 소나무 숲으로 난 좁고 어둑한 오솔길에 요즈음 한창 꽃무릇이 피어서 흐드러졌습니다. 겨울을 나고 오월 무렵 까지 새파랗던 잎이 마르고 나면 여름내 꽃이 있는지조차 모르는데 제 필 철을 잊지 않고 저렇게 연한 대궁을 무더기로 내밀고 꽃을 피웁니다. 무엇이던 성글어 가기만 하는 계절이라 꽃은 피어도 호젓하기만 하지만 그걸 아는지 오늘은 검은 산 제비 나비들이 꽃 위에 무리지어 춤을 춥니다. 붉은 꽃과 검은 나비의 그 강렬한 대비가 잠시 어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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