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북방 민족의 영원한 평화의 상징

  
 
  
 
고대에는 나라의 안위와 화친을 위해 여인들이 상대국 왕이나 귀족의 부인 또는 후궁으로 보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미지의 나라, 미지의 상대와 결혼하게 되는 것이다.

왕이나 부자의 아내가 되는 까닭에 본인과 가족이 좋아했을 법도 하지만 언어, 풍속, 기후, 종교, 기질이 생소한 이역만리 외국으로 홀 홀 단신 시집을 간다는 것은 엄청난 심리적 압박으로 다가왔을 것이 뻔하다.

앞으로 소개되는 여인들의 결혼은 단순한 이민족간의 혼인으로 끝나지 않고 두 나라 혹은 두 민족 간에 어떤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다. 문화의 교류, 우호 증진 뿐 아니라 ‘혈통의 가교’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왕소군과 문성공주는 ‘시집보내 진’ 사람들이고 ‘룻’의 경우는 사랑의 용기로 ‘스스로 선택’ 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왕소군은 전한(前漢)시대인 기원전 30년경의 사람이다. 당시 한나라는 이민족에 비해 화려한 문화를 자랑했으나 북방의 무시무시한 기마민족 ‘흉노(匈奴)’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흉노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중국 북방의 현재 몽골지방에서 시베리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호령했던 막강한 기마민족이었다.

이 이야기는 흉노의 군사력에 전전긍긍하며 어떻게든 화친을 도모하려했던 한나라 황제 원제(元帝)때의 일이다.

나는 달라!

“얘, 너도 화공 ‘모연수’에게 돈 좀 바쳐야 되는 거 아냐?”
“그 따위 더러운 짓을 왜 한다지?”

“그걸 몰라서 묻니 황제께서 우리 후궁들의 얼굴을 일일이 볼 수 가 없으셔서 궁중의 화공 모연수를 시켜 모든 후궁들의 얼굴을 그려오라고 했다지 않니. 이 년 저 년 할 것 없이 뇌물을 갖다 바쳐 돈의 액수에 따라 초상화가 달라진다는 거야.”

“그러니까 못 생긴 아이라도 돈을 많이 바치면 좀 더 예쁘게 그려준단 말이구나. 하하하”
“여자가 웃음소리하곤……”

“하도 어이없어서 그런다. 그러나 나는 그 애 들과는 달라. 향기로운 꽃은 숨어 있어도 나비가 날아드는 법이야. 아무리 넓은 구중궁궐이라 한들 황제의 눈에 한번이라도 띄지 않겠어?”


그러나 이 당돌하고 자신만만한 어린 후궁의 계산은 빗나갔다. 17세에 궁녀로 들어와 5년의 세월 동안 황제의 그림자와도 마주칠 수 없었던 것이다. 뇌물을 주지 않은 자신의 초상화에는 추한 사마귀까지 그려 넣어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황제의 후회

그 즈음 북방의 흉노에서 사신이 왔다. 한나라는 오래 전부터 흉노에 공물과 조공녀를 보내 그들을 달래고(?) 있었던 터다.

황제는 자신의 아름다운 후궁 중 하나를 흉노의 ‘호한야 선우’(재위 BC58~BC31; 흉노족은 자신들의 황제를 ‘선우’라 불렀다)에게 시집보내야한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아니 아까웠다. 황제는 고심하다가 묘수를 생각했다.

“이봐라 화공들은 전에 그렸던 후궁들의 초상화를 모조리 가져와라.”
그는 손수 수백, 수천의 초상화를 넘기다가 밋밋하고 못생긴 한 궁녀의 초상화를 발견하고는 신하들에게 던져주었다.

“이 아이를 잘 단장시켜 사신에게 보여주고 선우의 후궁으로 데려가도록 해라.”
그날 흉노 사신은 절세미인을 대동하고 온 한나라 사신을 보고 감동했다.
“이런 절세미인을 보내 주시다니 황제의 도량이 참으로 넓으시오.”

황제는 흉노로 떠날 ‘못난이’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떠나기 며칠 전 위로주 라도 내릴 셈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런데 이럴수가! 자신에게 다가 오는 것은 ‘못난이 추물’이 아니라 절세가인이요, 가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아닌가!

황제는 이미 흉노의 사신이 그녀를 보았기에 이제 와서 바꾸지도 못할 처지가 됐다.
황제는 자초지종을 듣고는 분기탱천해서 즉각 화공 ‘모연수’를 참수했다.

그는 사신에게 핑계를 대고 떠나는 날을 며칠 미뤄 왕소군과 사흘 동안 함께 지냈다. 3초 같은 사흘이 흐르고 드디어 왕소군이 떠나는 날이 왔다. 황제는 분노와 후회와 아쉬움이 뒤범벅이 된 채 그녀를 보내야만 했다.
왕은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한나라와 흉노의 빛이 되라’는 뜻이었다.
슬픈 황제는 시름시름 앓다가 왕소군이 떠나고 겨우 석 달 후 죽고 말았다.


봄은 왔건만…

왕소군은 머나 먼 북쪽 ‘오랑캐(당시 중국인들의 시각에서)’땅으로 향했다.
말위에 앉은 왕소군은 비파를 켜며,

명아주 푸르러 무성하기도 한데
꽃다운 잎은 원래 누른색이었다네
새들은 그 곳에 깃들었다가
뽕나무 숲으로 모여든다지

라고 노래했다. 왕소군의 절묘한 연주와 청아한 목소리에 하늘은 날던 기러기가 날개 짓을 멈춰 떨어져 죽었다는 데서 나온 ‘낙안(落雁)’의 고사는 이렇게 유래됐다.

흉노는 야성(野性)의 지대였다. 바람도 강하고 땅도 거칠고 사람도 억세었다.
22세의 절세미인을 맞은 53세의 호한야 선우는 좋아서 입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는 최고위 관리들을 대동하고 삼십리 앞까지 친히 나와 왕소군을 맞았다. 그는 왕소군을 극진히 아꼈으나 너무 아꼈는지 결혼 2년 만에 죽고 말았다. 호한야와 왕소군은 아들 하나를 낳았다.

왕소군은 초기 몇 년 동안 흉노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듯하다. 고향을 그리는 그녀의 심정은 그녀가 남긴 시와 노래 그리고 후세인의 문장을 통해 절절히 그려져 있다.

‘(전략)…오랑캐 거친 땅엔 화초가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

흉노의 어머니

그러나 호한야가 죽고(기원전 31년) 선우가 된 호한야의 아들 ‘복주루’와 혼인한 후부터 왕소군은 많이 달라졌다.
복주루와 결혼했을 때 불과 24세에 불과했던 왕소군은 이 젊은 선우에게도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선우와의 금실이 좋고 흉노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왕소군은 성숙해 졌다.

그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체념 속에만 묻혀 살지 않고 백성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 궁실에서 틈틈이 익힌 지식을 십분 발휘, 거칠고 조악(粗惡)한 흉노 여인들을 계도했다.

“황비마마의 바느질 솜씨 얘기 들었니? 어쩜 그렇게 섬세하면서도 탄탄한지…”
“처음 보는 식물에서 가는 실을 빼 내 옷을 만들어 내는데 어찌나 가볍고 보들보들한지 우리가 입는 짐승의 가죽 옷은 거기 댈 바 아니다.”
흉노의 여인들은 황비가 하늘에서 내려 온 여신쯤으로 여겨졌나 보다.

왕소군은 한나라의 농업 전문가들은 불러들여 이들에게 농사도 가르쳤다. 유목과 사냥으로 육류가 주식인 이들은 이렇게 얻은 곡물과 신선한 채소로 충분한 비타민을 섭취할 수 있게 됐다. 백성들은 그녀를 어머니처럼 여기며 칭송했다.

‘복주루’ 선우와의 사이에 두 딸을 본 왕소군은 ‘영호연지(寧胡閼氏)’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는 그녀가 선우의 정식 황비로 추대됐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복주루 선우도 그녀와의 11년 결혼 생활을 끝으로 세상을 떠난다.(왕소군 35세 경) 그녀는 이후 재가하지 않고 흉노 백성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사분오열되는 흉노를 안타까워하며 한나라와 흉노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녀의 정성과 외교의 덕이었는지 그녀의 시대와 이후의 80여 년간 한나라와 흉노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백과 두보, 왕안석, 상건 등 당대 중국의 명사들이 한 결 같이 왕소군을 노래했던 것을 보면 그녀는 한인(漢人)들에게는 ‘오랑캐에게 보내졌던’ 곱디고운 ‘민족의 여동생’으로 어떤 측은함과 미안함과 아련함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인 것 같다.

그녀의 아들 ‘축일왕’ 일족은 세력다툼에서 밀려 서쪽으로 이동, 제국을 건설하고 현지인들과 융화되며 오늘날 헝가리와 세르비아 계의 주축이 됐다고 한다.

중국 내몽고 자치구 후어타오터 시(市) 남쪽에 잠들어 있는 그녀의 사망연도는 정확치 않다.
왕소군은 중국과 북방 민족의 영원한 평화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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