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영 기분이 찜찜하고 나쁩니다. 딱히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꿈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짝 깨었다고도 볼 수 없는, 몸도 무거운 것 같습니다. 한번 뒤척여서 베개를 바로하고 오른쪽으로 누워 새우처럼 등을 구부렸습니다. 대개는 이러면 이내 다시 잠이 드는데 잠은커녕 이제 아랫배가 슬슬 불편해졌습니다. 그래도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기 보다는 좀 더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반대로 뒤척여 눕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압니다.

어렵게 눈을 떠서 머리맡에 놓인 시계를 보니 새벽 3시30분, 잠은 잘 만큼 잤습니다. 어젯밤, 8시 뉴스를 보다가 중간에서 잠들고 말았으니 여섯 시간이 넘게 잔셈입니다. 서둘러 일어나서 책상위에 놓인 스탠드의 스위치를 켜고 옷을 주어 입고 밖으로 나갑니다. 화장실에 앉으니 그제야 기분이 조금 나아집니다. 좋지 않은 것을 몸속에 넣고 잠을 잤으니 처음에는 그 덕분에 어쩐지 모르고 곯아 떨어졌더라도 깰 녘에 기분이 좋을 리 없지요.

어제 읍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 그곳을 그냥 눈 질끈 감고 지나왔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마음과는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저절로 그곳에 멈춰서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냐고요? 주막집 말고 또 있겠습니까. 항상 무슨 일이라는 것이 때로는 필연적으로 때로는 우연하게 일어나서 그리 됐노라고 핑계를 대는 것이지만 어제도 역시나입니다. 아는 형님 한 분이 제가 그곳을 지나가는 꼭 그때 문밖에 나와 있다가 저와 눈이 마주치더라는 겁니다.

그 순간 갑자기 제가 그곳에 들어가야 될 필연적인 이유가 생겨버리지 뭡니까. 그 주막집은 면에서는 연세 가장 많이 자신 할머니 한 분이 꾸려나가는 곳인데 여름내 술을 끊는 답시고 발걸음을 하지 않았으므로 들어가서 인사라도 드려야겠다는 그 가상한 이유까지 말이지요. 물론 주막집 앞 100미터 전부터 나도 모르게 목이 컬컬해졌다는 사실은 감춰둔 채로요.

주막집 안에는 두 사람이 더 앉아있었는데 저랑은 형님아우하며 늘 술잔을 같이 나누던 사이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다는 것 다 아실 겁니다. 대저 남자가 술집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술을 먹는다는 것을 99퍼센트는 전제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약간의 격식을 처리한(!) 끝에 자리에 앉아 술잔을 받았습니다. 참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술집에 앉아있는 시간이 아까워서, 몸이 예전만 못해서, 돈이 없어서 따위 참 구질구질한 이유로 출입하지 않았는데 주막에 턱하니 앉아 술잔을 앞에 놓으니 갑자기 호연지기 같은 게 구름일 듯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술을 끊었던 게 옳은 것인지, 이러는 게 좋은 것인지 마구 헷갈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상당량의 이성이 작동하고 있어서 ‘오늘 하루만’이라는 저 혼자만의 약속을 하기도 하고 ‘조금만’이라는 경계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예견된 것이면서 예기치 않게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제가 오랜만에 왔다고 인사를 받은 할머니가 주방에서 한참을 구부렁거리시더니 특별안주를 내놓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껏 술을 먹던 사람들은 왜 자기들은 주지 않느냐고, 사람차별이 너무 심하다고, 기분 나빠서 한잔 더 해야겠다고 온갖 소란을 다 피우는데 그런 것이 사실은 술꾼들의 술맛을 더하는 안주이기도 한 것이라 술자리가 길어질 수밖에요.

점심 전에 집에 들어가야겠다던 생각이 점심 전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이러면 집에서 혼자 기다리며 점심도 놓칠 아내에게 전화라도 한통 해 드려야 되는데 그 생각마저도 느슨해졌습니다. 이내 일어나서 집에 가야한다는 의식이 아직은 머리에 남아 있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어느 한순간, 술 한 모금 차이로 그 이성과 무모함의 경계는 무너져서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다른 주막집을 찾아 나섰습니다. 술친구들은 저와 오랜만에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자며 물귀신이 되어 저를 부추기고, 저 또한 다른 주막집에도 얼굴을 보여서 형평성을 가져야 된다는 참으로 훌륭한 생각으로 정신무장을 다시 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집은 저에게는 먼 누님뻘 되는 분이 하는 주막인데 어업도 겸하며 벌도 몇 통 치셨으므로 갈 때마다 20년 넘게 벌을 쳤던 제 기술을 가르쳐 드리기도 합니다. 제가 가지 않았던 동안에도 전화로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오기 일쑤였는지라 어제도 그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지목된 벌 두통을 살펴봐드리고 처치 방법을 가르쳐드렸습니다. 그러니 술은 또 언제나 그렇듯이 공술이겠습니다만 무슨 호기여선지 돈 아까워 술 못 마시겠다는 생각도 잊고 술값부터 미리 내고 술을 마셨습니다. 제 딴에는 오랜만에 왔으니 술값 한번은 내고 마셔야겠다는 것이었겠지요.

그 집에서 일어나 이번에는 포장마차를 하는 같은 굿패 회원의 집으로 삼차를 갔습니다.  제가 집에 도착한 시간이 아마도 오후 4시쯤이지 않나 여겨집니다. 차를 새로 사면서 눈에 잘 띄는 운전석 앞에 저는 이런 문구를 써 붙였습니다. ‘나의 운전 3금칙’이라는 제목아래 음주운전금.과속운전금.신호위반금이라고 말입니다. 차에서 내리니 그 순간에서야 그것이 저를 보며 후유, 안도의 숨을 쉬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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