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나락 벨 때가 다가오는데 태풍이, 그것도 두 개 씩이나 연달아 올라온다는 예보가 있어 어찌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다 된 농사인데 비바람이 몰아 때려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리고 또 그 위에 비가 지짐거리기라도 하면 이것 참 난리가 아닐 수 없지요. 그래서 조금 서운해도 일찍 베어버릴까 했는데 멸구피해를 본 논들의 주인이 바짝 서두는 통에 콤바인 차례도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먼저 온 태풍 하나는 중국으로 가고 나중 것은 동해 쪽으로 빠졌습니다. 피해를 본 그쪽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발등에 불이 비껴가니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오더군요. 비는 한두 차례 왔지만 양이 많지 않아서 가을일하기에 별 어려움도 없고 오늘은 날씨마저 참 맑습니다.

이런 날은 들깨를 베어야 제격입니다. 익으면 베는 것이지 들깨 베는 날이 따로 있겠습니까만 들깨만큼은 맑은 날 베면 들깨향이 펄펄 살아있어서 좋습니다. 그러면 참 가을답지요. 들깨 냄새를 빼고 나면 가을의 냄새랄 게 없습니다. 아, 또 있습니다. 하마터면 빼놓을뻔 한 그것! 산에 가서 푸나무 해 말려서 고구마를 찌면 그 푸나무 타는 냄새와 고구마 익는 냄새, 이것 또한 결코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되는 가을의 냄새입니다. 생각만 해도 코가 벌름거려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그 냄새를 기억하며 들깨를 베니 이렇게 흥이 나네요.

그래서 맛있는 것 아껴 먹듯이 야금야금 들깨도 아껴서 벱니다. 내일도 베고 모레도 베고 글피까지 베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들깨를 땅에 쏟겠지요. 다 된 농사라 하루가 다르게 노랗게 물든 잎들이 떨어지고 끝이 말라가니까요. 제가 들깨를 너무 추어올리는 것인지는 몰라도 들깨 끌텅에는 발도 잘 다치지 않습니다. 참깨는 들깻대보다 덜 단단해도 베어지는 면이 워낙 날카로워 고무신 따위는 쉽게 뚫고 발까지 상하는데 들깨는 그 면이 그다지 날카롭지 않답니다.

들깨는 말라서 털 때도 허물이 없어 좋습니다. 베어서 그냥 땅에 깔아놨다가 다 마르면 무더기 무더기로 들어다가 멍석위에 놓고 걸터타고 앉아서 엉덩이로 뭉개도 좋고 참깨처럼 조심하면서 두번 세번 털지 않아도 되니까요. 이런 차별을 참깨가 안다면 저에게 눈을 흘길 터이지요.

약 두 시간 정도에 걸쳐서 아쉽게도 들깨를 다 베고 내친김에 논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제 내일모레 콤바인 차례가 오니 논에 가서 네 귀퉁이를 베어놓아야지요. 물론 낫은 무지무지하게 날카롭게 벼루어서요. 낫을 들고 논에 들어가는 기분도 참 좋습니다. 거름이 몰린 한군데가 조금 쓰러지긴 했어도 나락은 예년보다 더 잘 되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락 모가지에서 찰랑찰랑 소리가 나는 듯하고, 푸른빛과 샛노란빛의 중간쯤이나 되는 이 나락빛깔에서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있어 더 좋습니다. 자, 이제 제 솜씨를 한 번 보시렵니까? 양발을 적당하게 벌리고 허리를 구부려서 네댓 포기를 낫에 걸어 슬쩍, 그러나 거기에는 눈부시게 부드러우면서 빠른 오른손과 왼손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차드락 차드락 소리와 함께 한 점 흐트러짐에 없는 가지런한 나락 한 아름이 베어집니다. 이걸 세 번 하면 한 다발이지요. 이것도 밤새껏이라도 베고 싶습니다. 허리도 아프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기분 좋은 낫질, 이 솜씨로 허리가 휘도록 쉬지 않고 일하고 싶습니다. 베어 까는 낫질은 왼손바닥이 땅을 향하게 나락을 쥐어야 하고, 잡아 묵는 낫질은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해야 되는 것을 가르칠 사람이 없는 게 아쉽습니다. 콤바인을 돌릴 수 있도록 네 귀퉁이 한 다발 정도씩을 베면 더 이상 벨 수 없는 게 섭섭합니다. 많이 베어놓으면 그것을 나중에 콤바인에 사람이 손으로 들어올려 집어넣어야 되기 때문에 오히려 일이 더 생길뿐입니다. 부드러운 논흙을 딛고 서서 고슬한 바람을 이마에 받으며 한 아름씩 나락을 베어서 안아보는 이 행위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에 순간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대체 무엇을 위한 기술의 진보인가?

물론 저의 자유의지로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이렇게 손으로 할 수도 있으니 제 맘에 달린 것이긴 하지만 아주 은연중에 기계에 포위되어버린 현실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제든 제 논두렁에 커다란 차일을 매고 농악을 치며 손으로 모내기를 하고 낫으로 베려니 하는 각오만 해를 더해가며 강해지지만, 실제는 거기서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괴로운 일중의 하나입니다. 아주 나중에 기계에 의존하지 않는 농사꾼들의 공동체라도 하나 만들거나 지금 당장 부분적으로 그리할 수 있는 사람들 끌어모아 실천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농업이 가지고 있는 이루 한량없는 수공업적 그 가치들을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습니다.

마당 멍석 위에서 끝물 고추가 말갛게 말라갑니다. 여름이라면 햇볕이 따가워도 곯는 게 많은데 날씨가 건조한 데다 고추가 작아서인지 푸석한 느낌이 드는 게 곯지는 않겠는데 볼품은 덜합니다. 그래도 마당 한 가운데 떡하니 무언가 마르고 있다는 게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지난겨울에 만든 멍석이라서 더 그런지도 모르지만 아침저녁 고추를 펴 널고 거둬 담을 때마다 참 기분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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