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시가 저에게 왔습니다. 햇볕 좋은 가을 날, 며칠 콩밭에서 살면서 그 햇볕과 바람을 고마워하며 즐겼더니 시상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하루 종일 일할 수 있는 것은 햇볕과 바람이 나를 충전시켜주기 때문’이라는,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이제 시가 저에게 족쇄를 채웠다는 의미입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무엇에 취한 듯 제 정신이 아닌 채 시가 시키는 대로 끌려 다니며 그 형상을 찾아서 새겨야 합니다. 일은 하고 있지만 그것은 무의식에서 나오는 동작일 뿐 저의 생각은 애먼 데로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누가 보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얼이 빠져있는 것 같기도 할 테고, 미친 듯 중얼거리기도 합니다.

종이에 무엇을 적어 주머니에 넣었다가 이내 도로 꺼내 지워버리며 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안타까워합니다. 글자 하나를 가지고 이래봤다 저래봤다 하느라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켜기를 수십 번, 얼추 한편의 시가 되어갑니다.

그러나 아직 멀었습니다. 핵심은 드러냈으되 운율이 없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드러내되 숨기기란 더 어렵습니다. 진실로 시의 생명이 여기 있으니 잡힐 듯하다가 놓치기를 다시 수십 번, 이러다 보면 처음의 생각이라는 것(시상)이 얼마나 허술한 미끼를 가지고 저를 낚아  챘는지 웃음이 나오지요. 하지만 이런 조탁의 과정에서 저의 인식 세계가 더 둥글고 원만해집니다. 이제 이렇게 한편이 지어졌습니다. 저는 이것을 깨끗한 종이에 잘 써봅니다.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아직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거리두기입니다. 일종의 냉각기를 갖는 것인데, 사랑이 끝난 사람들처럼 서먹할 정도의 거리에 시를 두고 남 보듯이 바라봅니다. 한동안을 말이지요. 진절머리 나도록 죽자고 사랑했던 그 마음이되, 무엇이 잘못되어 이 모양인가 하고 시를 들여다봅니다.

그러면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하고 이것이 아닌 것인데 쓸데없이 헛다리짚었는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시가 달아나버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 제 능력 없음의 한탄스러움이라니! 그러나 한편의 시가 지어지겠다는 그 예감과 느낌을 불안스레 이어가며 형상을 안타까이 구하다 보면 어느 한곳이 잘못되어 전체가 삐걱거렸음을 간파하는 점정의 순간이 오고, 드디어 시가 완성되어 족쇄가 풀리는 것을 느낍니다.

참았던 깊은숨을 토해내며 심연으로부터 물 밖으로 솟아올라 창공을 차고 나는 대자유가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천지에 본디 있던 시가 저를 택해서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저는 단지 정을 잡은 석수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은 덤으로 주어지고요.
너무 거창한가요? 이 가을의 막바지에서 시 한편 지어 여러분께 편지 올립니다.
 
가실

거미 똥구녁에서 나오던
은실 같은 햇볕이 어루만지고
마실 돌던 바람도 해찰을 하며

조근 조근
되작 되작
종일 콩을 달래구 있구나!

막대기 하나 지팡이 삼아
달아난 삼형제 찾아 나서시려나
산그늘 수건 고쳐 쓰고서

땅에 몸을 부리고 일할 때는 늘 지극함과 경건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행위 그 자체만 있을 뿐 ‘나’라는 존재는 자연에 육화되어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래서 농사는 제 시의 무한한 원천입니다. 저에게 농사짓기와 시 짓기는 동의어입니다.

가을 비바람이 한차례 대지를 훑고 지나가자 그 곱던 단풍이 하룻밤 사이에 다 떨어져버렸습니다. 마당 토방 뒤란 가릴 것 없이 낙엽이 한불 깔려서 갈퀴질을 해야 할 정도입니다. 뒤란 화장실 가는 길은 참말로 더해서 밟으면 푹석푹석 하는 느낌이 듭니다. 감나무 이파리도 말끔하게 떨어지고 나니 그 붉은 감이 가을 과일임을 더 알아주게 되고 화단엔 샛노란 국화만이 의연하게 빛을 내 뿜으니 그것이 진정 가을의 꽃임을 수긍하게 됩니다.

당나라 때 시인이 그랬던가요? ‘울안의 국화를 보다가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던. 낙엽 쌓인 뜨락과 소쇄하게 드러나는 산 오솔길을 글을 쓰다 말고 나가 저도 오랫동안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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