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시인의
감성편지


아무리 ‘가을비는 구럭 쓰고도 바워낸다’고 할 정도로 적게 온다지만 오래 가문 날씨에 온다는 게 겨우 5밀리미터 미만이랍니다. 그것도 찔끔찔끔. 이제는 수확기도 끝나서 일하는데 지장이 없으니 배추, 마늘, 양파. 보리에게는 많이 와야 하는데도 말이지요. 그 찔끔거리던 것도 날이 밝으니 바람이 쓸어가서 다 어디로 가버리고 저는 서리태 걷어 놓은 것 빨리 마르라고 고춧대 뽑아낸 비닐하우스에 가져다 널자고 학교 친구랑 집에 와 있는 아들 녀석에게 말했습니다. 일이라면 싫어하는 애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대견타는 생각과 함께 그럴 때는 네놈이 또 뭔가 요구하겠지 하는 지레짐작도 있었습니다.

아침 먹고 아홉시 반께 저는 일하러 나가면서 저희들 방에 들어가 만화를 보고 있는 애들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대답이 시원찮습니다. “넵”하고 번개같이 나와 주었으면 좋겠는데 두 번 세 번 불러도 그 타령입니다. 귀가 조금씩 어두워져서 애들의 새된 목소리나 작은 것은 잘 알아듣지 못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제 말이 제대로, 확실하게 전달되게 하려고 좀 강하게 열 번 셀 때까지 나오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자 주둥이가 주먹만큼 부르튼 녀석이 나오며 뭔가 구시렁대더니 다시 부엌에 들어가며 문을 부서질 정도로 세게 닫았습니다. 순간 열이 나네요.

이 순간이라는 것이 참 중요한데 말이지요. 저는 마루에 앉아서 애를 불렀습니다. “너 이리 좀 와봐.” “왜?” 안 오면 어쩔 건데 하는 식으로 몹시 불손합니다. 그런 꼴이 처음이라 저는 당황했습니다. “너 그러다가 아빠를 마치 팰 것 같구나?” 말하고 나니 몹시 화가 납니다. 그러면서 “너 이xx, 일 안해도 좋으니 당장 이집에서 나가!” 전혀 예정에도 없고 생각지도 않은 말이 제 입에서 튀어나오며 그 말에 냅다 제가 더 화가 난 듯 길길이 뛰었습니다. “공동체 학교엔 불쌍한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이런 순 싸가지 없는 자식, 호강에 겨워 지랄하네. 개xx 같으니라고.” 입에 담지 말아야 할 말들이 나왔습니다. 꼭 무엇이 시킨 듯 정녕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제 안식구는 “친구도 와 있는데 왜 그러느냐”며 한사코 저를 제지했지만 그럴 땐 아내 말이 효과가 있나요, 그것은 오히려 조금 더 제가 길길이 날뛰게 하는 기름기일 뿐이지요. 그러고 나서 저는 경운기 끌고 나가 밭을 갈았습니다. 서리태 콩밭 있는 데까지 갈 동안 그 콩을 애들이 치우기로 한 것이고 치워낸 그 자리까지 저는 오늘 갈아엎으려고 했으니까요. 한 삼십분 그렇게 갈다가 얼핏 보니 배낭을 꾸려 둘러맨 두 녀석이 큰길로 나가는 게 보였습니다. 그 뒷모습에 그만 가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이라기엔 적당치 않은, 너무나 묵직하고 먹먹한 것이 온몸으로 퍼져 나른해져버리는 그런 것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차마 자존심 때문에 붙잡을 수는 없는 그런 것이지요. 경운기를 멈추고 집 마당으로 오니 아내가 울고 있습니다. 아니 아내가 아니라 어머니라서 그런 것이겠는데 저는 한편으로 ‘그래 사내자식이 그 정도의 결기는 있어야지! 나쁜 일만은 아니야’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제 자신의 허위의식이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그 어떤 일을 당해도 사전에 미리 상상해보는 버릇 때문에 냉정한 저인데 자식 문제만큼은 아니더군요. 우선 안위가 걱정됐습니다. 하룻밤 정도는 저도 속상한 핑계로 일주일동안이나 끊었던 술을 입에 댄 덕분에 정신 놓고 잤지만 그 후론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아들 녀석이 움직인 동선을 따라가며 족적을 확인하는데 어느 선에서 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읍에 있는 외갓집에는 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탓에 그곳에도 오지 않았고, 그러니 부모의 온갖 몹쓸 상상력이 보태져 말 그대로 속이 타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부모자식의 관계를 떠나서 이런 것이 ‘수컷들의 쟁투’라는 것일까요?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지 않는 동물의 그것 말이지요. 그 피 튀기는 ‘순간’이 지나고 나야 비로소 부모라는 이성, 자애, 아니 맹목적성의 그 일방적 사랑이 작동하는 것 말입니다. 상처 입은 짐승이 컴컴한 굴속에 엎드려 신음하고 있는 느낌이 전해져오니 저의 모든 행동이나 생각이 작동을 멈추었습니다.

‘아무리 부모자식간이라도 온전한 인격체인 한 인간에게 한 인간이 상처를 줄 권리는 없다’라는 자각이 해를 바라볼 때 눈을 되쏘는 자극만큼이나 아프게 저를 각성시켰습니다. 위로 딸 셋을 키우면서 한 번도 이런 것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의 미숙함이 자아낸 결과가 이렇게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은 좀 더 바람직한 애비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해도 고통은 가혹했습니다. 시인 박목월이 이야기 했지요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어설프기만 할까요? 어리석은 것이지요. 턱도 없이 죄의식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겠지만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더군요. 사춘기라는 협소한 의미망에 애들을 가두고 단기적으로 이해해주려는 자칫 ‘오지랖 넓은 채’도 경계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이런 꼴을 겪고 있을 지상의 모든 부모들의 그 등 뒤에 서린 외로움을 알게도 되었습니다. 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미안하다 아빠가 너무 심하게 했구나, 용서해라. 그리고 또 술을 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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