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상들, 야반도주하는 백성 때문에 빚더미

특히 싸리나무와 비자나무는 어렵게 구해 쌓아 놓아도 팔리지 않았다. 우창이 한양 목상들에게 상권을 넘겨준 다음부터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막대한 이문이 남는 나라의 중요산업인 목재 경기가 없어지자 불만을 토로하는 떼상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기존 떼상의 일거리가 한양 목상에게 넘어가자 운반권을 가졌던 자는 저절로 소외됐고, 반기를 든 몇 명은 원인 모를 사고로 하나둘씩 죽어갔다.

급기야는 장역관의 큰아들 장상두가 떼상의 우두머리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비명횡사했다. 한양의 목상 선주를 맡은 무사들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지역 떼상의 모습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강제로 동원되는 공납목재만 관할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지역민에게 돌아오던 엄청난 수입이 사라진 것이었다.

목상은 공납을 위장하여 반출하는 목재를 한양에서 민수용으로 팔면서 많은 부를 쌓았고 그 일부를 지방 수령에게 헌납했다. 죽어가는 것은 백성뿐이었고 보부상들의 고객이었던 백성들의 수입이 줄자 물건 구입이 현저하게 줄었다. 사람들에게 가을의 곡식을 받기로 하고 외상으로 물건을 주었으나 추수도 하기 전에 산중으로 도망치고 마는 실정이니 자연 보부상들의 빚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도방회의가 열릴 때마다 해야 하는 결제를 해결하지 못한 보부상들이 부지기수였다. 지금까지 수십년 보부상이 활동해 왔지만 지금처럼 어려운 때는 처음이었다. 빚을 갚지 못하고 도중에 죽거나 다른 곳으로 도망이라도 갈라치면 약정된 법에 따라 고율(高率)의 이자는 물론이고 고용된 무사들이 빚 받기에 나섰다. 무사들은 각지를 돌며 채무자를 찾았고 여차하면 가족을 윽박지르거나 끌고 가서는 노비로 팔기 일쑤였다. 그들을 피해 자연히 산중무리가 되는 사람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보부상들이 장사 길에 나서면 그들대로 고통이 심했다. 냉해나 한해가 겹치면 낮 일은 반으로 줄고 무거운 세금을 내고 나면 한해 겨울을 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새로운 농사법인 모내기가 보급되는 점이었다. 따사로운 양지녘에 사월 초순 씨를 미리 부었다가 사월 말쯤 뽑아서 논에 심으면 볍씨도 적게 들고 모도 튼튼하고 죽지 않고 잘 자랐다. 이 방법은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씨앗은 반의 반으로 줄일 수 있고 물일하기도 편하고 게다가 더 많은 농사도 지을 수 있었다. 종전 같으면 사월 말쯤 넓은 논에 씨를 뿌려 씨와 피가 한데 자라 김매기가 몇 곱절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모내기로 농사를 지으면 김매는 것을 반 이상 줄일 수 있었다.

모내기는 보부상을 통해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실제로 큰 촌에서는 작년부터 모내기를 했고 올해부터는 여강을 중심으로 퍼져나간다고 했다. 종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깊은 산골도 벼농사가 지어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낮은 곳에 씨를 먼저 뿌리면 한 달 후에 훨씬 높은 곳에 심을 수 있으니 기온이 맞지 않아 벼농사는 꿈도 못 꾸던 평창, 태백까지 모내기는 급속도로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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