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다더니 일 년이 눈 깜짝 새에 가버려서 큰 누님과 매형의 첫 제사가 돌아왔습니다. 매형 돌아가신 삼우제날 새벽에 누님도 그만 눈을 감으셔서 작년에 일주일 사이에 서울을 두 번 오르락내리락 했는데 제사는 한날로 모신다 하여 올해는 조금 덜 소란스럽습니다. 방학 중이어서 아들내미와 함께 아내는 닷새 먼저 서울 딸네에 갔습니다. 제사 전날쯤이나 제가 가면 함께 조카 집에 가서 제사를 보고 그 이튿날 내려오자는 약속을 하고서요. 그러니까 닷새 동안은 집에 저 혼자 지낸 거지요. 그러는 동안 날 좋으면 나무하고 나쁘면 방안에 들어앉고, 밥은 한번 해서 밥통에 두고 닷새를 먹었더니 나중엔 말라서 물에 팔팔 끓여 먹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김장김치가 마침맞게 익어서 굳이 다른 반찬을 만들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끼니마다 김치만 한포기 꺼내서 밑동 잘라놓고 밥 한 그릇 퍼다 그냥 부엌에 선 채로, 여러 날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식구들이 다 있어서 밥 한 끼 준비하고 먹는 일이 참 보통일이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시간이 대개 한 시간 반쯤 될 것인데 혼자 이렇게 먹으니 이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혼자 있을수록 잘 챙겨 먹으려니 생각해도 귀찮은 생각이 들면 어쩔 수가 없더군요. ‘조화로운 삶’을 쓴 헬렌 니어링이란 사람은 평생 조리하는데 바치는 시간이 아까워서 날 것인 채로 먹거나 아주 최소한의 과정만 거친 음식을 식탁에 올렸는데, 오래 혼자 사는 사람은 이거와는 달리 편식에 따른 심각한 영양불균형이 생기지 않나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세밑의 며칠을 그렇게 보내고 저도 서울엘 갔습니다. 서울에서 가까운 문산에 셋째 형님이 사시므로 제가 간 첫날은 아내와 함께 형님 댁에 가서 잤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서울은 가지만 형님 댁에까지 가서 자고 오기란 특히 수월치 않아서 어떤 때는 서울도 슬며시 몰래(!) 다녀오는데 이번만은 아내까지 서울에 있는 까닭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서울과는 또 달리 그곳 추위는 정말 장난이 아니더군요. 밖에 나와서 잠깐만 서 있어도 코끝이 얼어버리는 듯 매서운 날씨인데도 형님은 까짓것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오히려 그런 날씨쯤이야 보통이고 영하 이십 도가 넘어야 이곳은 추위라 할 수 있다며, 그런 날씨조차도 이십 도 넘어버리면 이십오 도나 삼십 도나 매한가지라고 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간 날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 다시 서울로 제사를 보러 올 때까지 만 스물네 시간을 방에만 틀어박혀서 뒹굴었답니다.

 밖과는 달리 방안은 지나칠 정도로 덥고 외풍이 없는 탓에 갑갑하기까지 해서 속내의만 입고 말이지요. 꼼짝 않고 방안에만 처박혀서 그렇게 있어보기도 난생 처음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하루 사이에 게으름이 붙어서 며칠이고 그렇게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골일 없는 때라 그러긴 하겠지만 삼시세끼 형수님이 맛난 반찬에 밥 주고 술 주니까 그게 내세상인 듯 했습니다. 시골 내 집에 있어도 그리하자면 못할 것이야 없겠지만 그곳은 아무래도 제 일과 차단된 곳이어서 아예 생각을 내려놓으니 더욱 그러겠지요.

조카들도 보고 누님 매형 제사 모신 이야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제사 핑계로 떨어져 사는 형제 넷이 한자리에 모인 까닭에 자연스레 이야기가 길어지고 술도 거듭되어서 저는 그만 이튿날 내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내려오려고 맘먹는다면야 왜 못 내려 오겠습니까만, 제삿날은 의정부에 사시는,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제 바로 위엣 누님 댁에 가서 죄다 함께 잔 탓에 늦게까지 서로 헤어지기 싫어하는 마음도 있었고 저는 또 저대로 딸이 사는 곳에 가서 하룻밤도 자지 못한 서운함이 겹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적대다가 저녁때가 되어버려서 에라, 하면서 내려오기를 포기해 버린 거지요.

혼자 있는 딸애에게 무언가 탐탁스럽게 한 가지라도 해 먹이고 싶어서 저는 저녁 준비할 무렵에 아내와 함께 바로 지척에 있는 시장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산 것이 고등어 세 마리 꼬막 1킬로그램, 그리고 청국장 두 덩이와 여섯 개들이 손으로 빚은 만두 한 봉지였습니다. 만두는 제법 커서 저녁 먹고 한참 놀다가 출출할 때 쪄먹으면 저 빼고 셋은 그런대로 괜찮은 양이겠다 싶었고, 청국장은 네 번 정도는 끓일 분량, 고등어와 꼬막은 지지고 간장에 졸여 놓으면 혼자 한 이틀이야 먹을 듯했습니다. 이만큼이 꼭 이만 원. 저는 집에 돌아와 딸에게 물었습니다. “한나절, 그러니까 네 시간 아르바이트를 해야 이만 원 벌수 있지?” “응”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딸애가 한 달 일해서 버는 돈은 오십만 원 정도랍니다. 그걸 가지고 차비, 전기, 전화, 수도, 가스 비용 내고 나면 영화 한편, 커피 한잔이라도 폼 나게 즐길 수 있을까요? 반찬은 집에서 보내준다지만 그것도 기껏 김치와 양념일 뿐이니 더 벌지 못하는 이상 딸애도 서울에서 늘 김치만 먹고 같은 옷만 입을 수밖에 없겠더군요.

사람이 단순히 생리적인 지속을 하기에도 하루를 다 쏟아야 하는 이 세상에서 소모품이 되지 않고 살기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특히 서울은 시골과는 달라서 한 발짝만 움직여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니까 말이지요. 이거야 말로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누님제사를 보러가서 새해에도 결코 희망적이지 않은 우리네 현실만 다시 확인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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