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이지함, 권력과 짝하지 않는 팔도 ‘유랑자’

양반과 탐관오리의 횡포에 도적이 되어 산중을 떠돈 그들은 기쁨 반, 두려움 반, 설레는 마음을 다 잡을 수 없었다. 이곳을 떠나 고향도 아닌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내일이면 죽령고개의 도적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었다. 먼 산 너머 아득히 보이는 치악산이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금수산 아래 우창에 있는 아니 이제는 어느 곳으로 팔려갔는지 알 수 없는 아내 생각이 났다. 신혼의 단꿈이 가시기도 전에 억지로 끌려가는 아내를 보며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원수 같은 목상은 살려주고 상관없는 양민의 목을 치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용두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강 건너 우창 쪽을 매일 바라다보았다. 이제 목상을 혼내어 한 가지 한은 씻었지만 마지막 한을 위해선 힘을 길러야 했다. 그래야 노도같이 우창을 쓸어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억수가 흔들 때까지 두목은 망상에 빠져 있었다. 입가에 쓴 웃음이 퍼졌다. 풀잎에 스치는 바람 소리에도 긴장하며 날렵했던 자신이 억수가 흔들 때까지 맥을 놓고  있었다니 두목 용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억수야, 넌 꼭 양민이 되어야 해. 고향은 가슴속에 묻어 버리고.”
“고향에 가면 뭐해요? 반겨줄 사람도 없는데……. 관청도 드세서 원님에 따라 원망과 선망이 오락가락 하거든요. 지금 원님은 백성을 기름 짜듯 한다고 하니 아마 다들 죽지 못해 붙어있을 겁니다.”
두 손을 마주 잡은 그들의 눈에 굵은 눈물이 흘러 내렸다.

토정의 형, 지번은 늘 걱정이었다. 유림이 전국을 휩쓴 지 오래고 조정관아가 모두 유림에 몸담고 있는데 유달리 동생 혼자만 주역에 빠져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정을 돌보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조상의 묘까지 파서 이장하자니 형으로서는 쾌심하기 짝이 없었다.
일찍이 지함은 조실 부모하고 형 밑에서 크면서 배우고 자랐는데 워낙 영특하고 외모가 준수하고 늠름했다.
그런데 남들 모두 부러워하는 소과에 장원했는데도 벼슬을 마다하다니…….
지번은 동생을 바로 잡고자 많은 벗을 사귀도록 주선하고 틈만 나면 관리들 앞에서 동생을 소개시키곤 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는 동생의 이야기만 나오면 슬그머니 피해야 했다. 지번 자신에게까지 해를 끼치는 것 같아 괴로움이 일었다.
지번이 문정왕후의 오라비인 윤원형 집안과의 혼사를 피하기 위해 청풍군수로 재임한 후 얼마 안되어 퇴계 이황이 단양 군수로 오자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여러 정세를 논하고 한문을 토론하는 절친한 벗이 되었다.

이러한 환경이 주어지자 아우인 지함을 가까이 두고 매사에 그의 앞날을 걱정했지만 지함은 그런 형의 뜻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팔도를 유람하다 가끔씩 청풍에 들르고 구담봉 토담에 들려 며칠씩 묵어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토정은 형님이 청풍군수로 있던 옛날이나 자신의 친구인 준량이 단양군수로 있는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글=조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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