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번, 토정에게 구담봉 명당터로 ‘조상묘 이장’ 요구

준량은 매사에 합리적이고 관리 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또 준량은 조정에 근무하면서 지번을 스승처럼 따르고 지함과도 가깝게 지냈다. 동년배인 준량과 지함은 같이 동문수학한 막연한 사이였다.
지번은 토정도 준량처럼 벼슬길에 오르길 소원하였다.

“형님, 구담봉 명당 터는 당대에 정승이 줄줄이 나올 터입니다. 조상의 묘를 이장하게 해주세요. 제가 틀림없는 길지를 찾아 냈다고요.”
토정 지함의 간청은 집요했다. 형의 승낙만 얻어 놓으면 한걸음에 달려가 친구인 준량에게 구담과 옥순봉을 집안의 선산으로 물려받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형님이 요지부동 돌부처처럼 꿈쩍도 안 하는 것이었다.

지번은 동생이 지은 토담에 여러 날 묶으면서 여유 있는 나날을 보냈다. 오래 전 퇴계가 단양 군수로 있을 적에 사귀었던 두향을 만나 잠시 시문답을 하기도 하고 퇴계를 생각하며 여강의 강물을 벗 삼아 낚시를 즐기곤 하였다.
토정은 이러한 형님에게 자기가 내세운 잡학을 설명하거나 선조의 음택을 고집하지 않았다. 지번은 여유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함은 구담과 옥순봉 주변의 산세가 좋고 보기 드문 길지인지라 구담봉 정상 부근에 터를 잡아 토담집을 세웠다. 그리고 가끔씩 손님이 오면 옥순봉 토실로 안내했고 원만한 친분이 아니면 구담봉 토담집은 안내하지 않았다.

지번과 지함이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 토담집에 도착하니 소낙비가 제법 굵게 내렸다. 지번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마음속의 먹구름이 가시면서 산뜻한 느낌이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 얼굴에 화색이 돌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며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다가 갑자기 소낙비가 내린 탓인지 흙냄새가 풍겨 올라왔다. 한바탕 시원한 바람이 삼베옷 겨드랑이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소낙비가 한차례 지나 햇살이 비치자 지번과 지함은 밖으로 나왔다.

지번은 아우의 안내로 건너편 구담봉 근처 무지개가 피어나던 자리로 올랐다. 아늑한 분지 밑으로 저 멀리 여강이 내려다보였다. 좌측으로는 강 건너 금수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우측으론 제비 봉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저 아래의 노도와 같은 강물도 떡 비티고 있는 구담에 주눅이 들었는지 아무 말 없이 휘어져 흐른다. 마치 구담이 막고 잡아 틀어 놓는 형상이다. 서남쪽으로는 나지막한 산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고, 시야가 트인 저 멀리까지 여강이 막힘없이 흘렀다. 시원하고 통쾌한 느낌이 들었다. 며칠 여유를 두고 구담봉에 머무르면서 이곳저곳 살펴보고 생각에 잠기던 지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네 말대로 길지란 생각이 드는구나. 헌데 이 땅의 임자가 누구인가?”
“아직 임자가 없습니다.”
“그래? 단양군수가 준량이지?”
“예”
“그렇다면 내가 얘기하든, 네가 얘기하든 이 정도 땅은 들어주겠구나.”

“예. 그런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그래, 참으로 인연이란 알 수 없는 것이구나. 내가 몇 해 전 청풍 군수로 있을 때 저기 옥순봉에 누가 크게 암자를 세웠지 않았겠느냐?”
“저도 보았습니다.”

“남의 고을 땅에 단구동문이라는 암자를 세워 내 심히 괘씸한 생각이 들었느니라 하여 혼을 내주려고 알아보았더니 바로 퇴계가 한 짓이더구나. 허허허. 내 눈감아 주었었지. 그리고 나서 얼마 후 강선대에서 퇴계가 술좌석을 마련했기에 갔더니…….”

지번이 청풍 군수 재임 시 퇴계의 초청을 받아 강선대에 갔을 때의 일이다. 지번이 올라가자 퇴계는 없고 관기 두향만이 있었다. 두향이 지번을 보며 공손히 인사를 했다. 퇴계가 청풍 군수 지번을 초청하고 막 관청을 출발하려는데 고향 경북에서 손님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멀리서 온 손님이니 박정하게 인사만하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늦을 것 같아 먼저 두향이를 보낸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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