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시인의
감성편지



참 대단한 입춘 추위였습니다. 한겨울에도 그렇게 춥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수돗가를 꽁꽁 얼린 그런 추위였습니다. 꽃샘의 그것과는 또 다른 겨울의 마지막 위세라고나 할까요. 상당히 오랫동안 따뜻한 날씨가 이어진 다음이어서 그런지 날카롭기 이루 말할 수 없이 느껴졌습니다. 2월 4일이 입춘이자 설 지난 첫 말날이어서 저는 그날 장을 담갔습니다. 설 지난 첫 말날 담그는 것은 그래야만 장이 시어지지 않고 맛나다는 옛말을 따른 것입니다.

삼년 만에 담그는, 양이 좀 많은 메주여서 그 전날 준비는 다 해두었습니다. 아직 장항아리에 장이 제법 많이 남아 있기에 햇장 나올 때까지 먹을 것 두어 병을 떠놓고 나머지는 씨장으로 썼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씨장은 잘 담가진 옛 장을 새장에 조금 부어서 좋은 균을 만드는 것인데 그 양이 많아서 겹장이라고 해야 맞겠습니다. 장항아리에 차곡차곡 메주를 한 겹 넣으면 그 위에는 준비해놓은 참옻나무를 여러 토막 넣습니다. 그리고 또 메주를 넣고 옻나무를 넣고, 이렇게 하면 장이 변하지 않습니다. 참옻은 더 없이 좋은 천연방부제이니까요. 옻이 우러나온 장을 먹으면 우리 몸에는 우루시울이라는 성분에 어느덧 내성이 생겨서 산에 가서 옻나무를 만진다 해도 가려움증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1킬로그램짜리 메주 60개를 그런 식으로 쟁여넣고 나니 알맞게도 항아리가 오분의 사 쯤 찼습니다. 가득 채우면 더욱 좋지만 그것은 옛날 임금님 잡수실 장이나 그렇게 만들었고, 우리는 항아리에 오분의 삼 정도만 채워도 장이 진하게 됩니다. 맨 위는 통고추를 여러 개 넣고 우선 뚜껑을 닫아둡니다. 그런 다음엔 커다란 그릇에 소금물을 풀어야 합니다. 냇가에서 흘러내린 자연수를 받아 간수가 빠진 소금을 넣고 저으면 검불 같은 것은 위로 뜨고 뻘물은 가라앉지요. 소금이 다 녹으면 염도계를 넣고 짠 정도를 가늠하는데 이때 소금물의 농도는 장맛을 결정짓는 참으로 중요한 요인입니다. 저는 항상 장이 변하지 않을 임계점까지 염도를 낮추려 노력합니다. 그래야 장이 달고 맛있으니까요. 그러므로 메주를 가를 때까지는 마음이 조마조마 합니다. 자칫하면 염도가 낮아서 중간에 장이 곯게 되니까요. 그걸 막기 위해 옻나무를 많이 넣고 불이 활활 타오르는 소나무 장작 숯을 더 넣는 겁니다. 그것도 중간에 들어내 버리고 한 번 더 넣어주기도 하고요.

이렇게 소금물까지 준비해 놓고 하룻밤 지난 다음이 말날이었습니다. 이제 제 아무리 날이 추워도 걱정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희 장으로는 날이 추운 게 더 좋다 하겠습니다. 염도 낮은 장이라서 그래야 변하지 않을 테니까요. 서울에서 내려온 딸애에게 장을 가르친다고 어제 한나절 추위 속에 서있게 했는데 다시 한번 더 불러내서 소금물 붓는 일을 같이합니다. 소금물은 항아리에 가득 차게 붓습니다. 조금 남겨서 나중에 더 부어주어야 하고요. 마지막으로 아침 아궁이 솥에 물 덥히느라 활활 때고 있는 소나무 장작 숯을 집어다 넣습니다. 이것은 다 타버리면 재미없습니다. 조금 덜 탄 것이어야 소독이 잘되어 나중에 나쁜 곰팡이가 피지 않는답니다. 이렇게 장 담그기가 끝이 났습니다.

제 아내가 마지막으로 장항아리의 몸뚱이를 행주로 닦아줍니다. 금년 장은 더 맛이 있을 듯합니다. 딸이 함께 했고 아내가 염불하듯 항아리를 닦아서 마무리 했으니까요. 이제 날마다 옆산 뒷산의 봉우리들이 굽어보고, 장독대 옆의 소나무 대나무 가지들이 너울너울 들여다보고, 거기에 앉은 박새 곤줄박이 참새들이 다녀가고, 저희 식구들 또한 뒤란에 올 때마다 살펴볼 것입니다.

아무래도 햇장이 익으려는 게다
고통 없는 성불도 세상에 있으랴만
눈물만 가득 찬 고해의 항아리에
봄 내내 묵언으로만 들어앉아
살 에던 겨울밤 신열에 들뜬 봄
풀어 붉은 마음 다 쏟아 보태더니
보태도보태도 미침이 없어
맵찬 통고추 잉걸 대는 숯불덩이로
몸에 연비를 넣었구나
그렇게 닳고 졸여도 이룰 수 없던가
스스로 불러온 마지막 결단
너를 둘러싼 철벽의 항아리 차라리 얼려 깨버리는구나
와장창! 이룸 없이 이루려는구나
보아라, 바로 그 지점
만다라처럼 한 송이 장꽃은 피며
성불이다! 장이 익는다.                            
- 꽃샘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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